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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an 04. 2019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8년

내게 경외심을 주는 김훈 작가는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했다. 에세이의 내용인지 인터뷰에서 한 말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듣기에 따라 꽤 냉소적으로 들릴만한 주장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책 읽기를 강요하고, 자신들도 새 해 목표로 몇 권 이상의 독서를 손쉽게 정한다. 물론 잘 지켜지지 않는 흔한 목표 중 하나다. 작가의 의중은 (내 짐작으로는) '책을 읽어 인생이 달라졌다, 심지어 돈을 벌 수 있다는 주장은 혹세무민에 가깝고, 책만 주야장천 읽는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남들 얘기에 현혹되지 말고 책을 읽든 뭘 하든 인생을 어느 한 가지에만 매달리지 말고 살라는 것'이라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 나쁠 건 없지만 딱히 생산적이진 않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드는 사람처럼 책을 생계 수단으로 하지 않는 이상, 책을 열심히 읽어도 10원짜리 하나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책값 등 돈이 든다) 독서는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고 상상력을 고양시키는 여가 활동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책에 꽤 많은 시간을 의지한다. 투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의지'다. 많이 읽진 못하지만 답답하거나 무료하거나 불안할 때 책으로 도망친다. 책이 도피처도 아닌데, 책과 함께 흘려보낸 시간은 덜 아깝다는 이상한 논리가 내 마음엔 자리 잡고 있다.  일종의 자기만족이고 교묘한 현실 회피다.  




작가 줄리엣 애쉬튼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The Guernsey Literary and Potato Peel Pie Society」은 예전에 봤던 같은 제목의 책을 원작으로 한다. 솔직히 이 책을 읽은 후 까맣게 잊고 있다 영화를 보고 새록새록 기억이 되살아났다. 세세한 내용은 잊었어도 『채링크로스 84번지』처럼 책으로 얽힌 사람들의 뭉클한 편지로 채워진 소설이었던 것은 기억난다. 둘 다 편지가 전문인 영국 소설이고 전쟁을 겪은 사람들 이야기인데, 분위기나 전개 방식은 사뭇 다르다. 개인적으로 100% 실화인 채링크로스 84번지의 이야기가 더 끌리지만, 이 이상한 이름의 북클럽 사연도 꽤 인상적이다.


알 수 없는 이끌림에 건지 섬을 찾아온 줄리엣


작가 줄리엣 애쉬튼(릴리 제임스 Lily James)은 자신이 쓴 책을 읽었다며 감사를 전하는 건지 섬의 도시 애덤스(미힐 하위스만 Michiel Huisman)의 편지를 받는다. 그는 줄리엣의 책을 읽고 북클럽 회원들이 긍정적으로 변했다며, 찰스 램의 소설을 찾는다고 문의한다.


종전 직후 영국령 건지 섬에는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건지 감자껍질 파이'라는 북클럽은 건지 섬이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핍박받던 주민들이 몰래 모이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만든 독서 모임이다. 전쟁이 끝나고도 명맥을 유지하는 북클럽에 흥미를 느낀 줄리엣은 약혼자 마크의 만류에도 건지 섬을 방문한다. 그리고 전쟁 당시 섬에 있었던 기막힌 사연과 비밀을 알게 된다.


줄리엣과 도시


도시 재건에 힘쓰며 유흥과 파티가 끊이지 않는 런던과 달리, 건지 섬엔 아직도 전쟁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줄리엣에게 편지를 보낸 도시가 혼자 기르는 딸 캣과 아이를 돌봐주는 주민들, 캣의 생모 엘리자베스의 부재가 남긴 가라앉은 분위기는 이곳이 아직도 전쟁 중이라는 무언의 시위를 하는 듯하다. 줄리엣은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처음 만든 엘리자베스에 대해 알아보지만, 무언가를 감추며 곁을 주지 않는 주민들의 싸늘한 태도에 당황한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줄리엣에게 도시는 점점 남자로 다가오고, 그가 캣의 친아버지가 아닌 친구의 아이를 친딸처럼 키우고 있다는 사연을 알게 된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회원들을 만난 줄리엣


전쟁은 먼 과거 같으면서도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현재가 되어 불쑥 다가온다. 남의 나라 얘기라 해도 인간이 겪은 아픔과 기막힌 운명은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건지는 영국 본토에서 외떨어진 작은 섬이다. 그러나 이 작은 섬의 비극은 그 어떤 전장보다  비참하고 안타깝다.

저항하는 와중에도 인간은 사랑하고 비밀을 품으며 인간애를 실천한다. 전쟁 당시 건지 섬에서도 용감한 젊은 여자가 사랑을 하고 비밀을 간직한 채 희생당한다. 섬의 비밀을 케면 켈수록 줄리엣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발이 묶여 약혼자 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 침울하고 작은 섬은 엘리자베스 못지않게 줄리엣의 운명도 바꾸어 놓는다.


약혼자 마크와 줄리엣


난 여전히 책 속에는 길이 없고, 책이 인생을 바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책 속의 인물들이 격정적으로 사는 모습을 엿보는 건 늘 흥미롭다. 그게 나와 상관없는 삶이라서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엘리자베스의 삶은 안타깝고 슬프지만, 줄리엣의 삶은 흥미롭고 부럽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줄리엣과 함께 방문하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들은 이 책이 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간직하면 좋지만 잃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는 보물들은 내 안에 수없이 쌓였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책이 주는 유용함과 무용함이다.


도시와 줄리엣을 이어준 시초가 된 사람, 작가 찰스 램에 대해 찾아봤더니 이 양반도 만만치 않은 사연을 품은 분이다. 정신 발작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누이 메리 램의 보호자로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니, 이 분이 작가가 안됐다면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을까. (왠지 작가는 이 정도의 사연은 갖고 있는 게 타당하다는 선입견이 작용한 탓이다)


편지로 시작해 아름다운 인연을 만든 줄리엣과 도시


웃음, 로맨스, 눈물, 공포... 이 네 가지가 다 있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하던데, 네 가지 장르를 골고루 품은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 아니, 이 네 가지 중 하나라도 빠진 인생이 있을 수 있을까. 이론적으론 가능하지만 실제 그런 생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내 삶의 장르는 마음대로 정할 수 없지만, 책은 내 취향대로 고를 수 있다. 책이 내 인생을 바꿀 순 없지만, 다른 인생을 선택할 자유를 주는 건 확실하다. 줄리엣과 도시처럼, 책으로 매게 된 인연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아름답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미 책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고 또 많은 것을 바꾸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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