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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an 08. 2019

나라면 너를 믿을 수 있었을까.

영화 <가려진 시간> 2015년

책이나 영화 혹은 무대 공연에서 판타지를 접하고 소비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다. 그런데 가끔 이게 단순한 소비 성향이 아닌, 인생관이나 가치관의 문제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믿고 안 믿고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정말 그럴까?) 나는 안 믿어도 내 사고 밖의 어딘가에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개연성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겐 안 일어나도 다른 누군가에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이해는 내 믿음을 넘어 가치관을 건드린다.  




소년의 시간은 멈췄다. 아니 반대다. 세상의 시간이 멈추고 소년의 시간만 흐른다. 무려 1900여 일이나. 세상과 괴리된 채, 나에게만 흐르는 시간을 유영하는 삶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성민의 친구는 끝내 자살한다. 존재적 불안은 그런 세상을 못 견디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한다. 생명을 파괴하는 건 불완전한 세상이 아니라, 멈춰버린 안전하고 평온한 시공간이다.     


절대 고독을 견디며 어른이 된 소년 성민


엄마가 돌아가시자 새아빠를 따라 섬으로 이사 온 수린(신은수)은 외톨이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아이다. 외로운 아이에게 고아인 성민(이효제)이 다가온다. 둘만의 글자를 만들어 쓰고, 둘만 아는 장소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더 이상 외롭고 지루한 곳이 아니다. 어느 날, 성민과 친구들을 따라 산에 간 수린은 산속 깊은 곳의 동굴을 발견하고 들어갔다가 폭발음에 놀라 정신을 잃는다. 깨어나 보니 아이들은 모두 사라졌고, 결국 혼자만 돌아온다.


외로운 세상에서 친구가 된 성민과 수린


성민을 비롯한 세 아이는 끝내 발견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갔었던 동굴은 흔적도 없고, 수린은 주민들의 따가운 눈초리에 의기소침해진다. 얼마 후 실종된 아이 중 한 명의 변사체가 발견되고, 성민과 다른 아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며칠 후, 자신이 성민이라고 주장하는 20대 남자가 수린 앞에 나타나 수린과 성민만 아는 그들만의 글자로 적은 노트를 보여준다.  


수린 앞에 나타난 성인이 된 성민


수린은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고 돌아온 성민(강동원)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분명히 일어난 일이다. 수린은 그가 실종된 아이들을 헤친 나쁜 사람이 아니라 제 친구 성민이라는 것을 어른들에게 알리려 무던히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논리에서 벗어난 해괴한 일엔 눈과 귀를 막으며 필사적으로 뿌리친다.


사실, 어른이 된 성민이 수린의 친구라는 사실은 이보다 더 논리적일 수 없다.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글자를 쓸 수 있고, 실종되기 전에 했던 일을 혼자 견딘 수년 동안 한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가 수린과 놀았던 숲 속의 빈 집에 수린의 모습을 새겨놓은 수백 개의 비누조각은, 소년이 청년으로 자랄 시간 동안 지켜온 인내와 우정 그 자체다. 외롭고 섬세한 어른이 된 성민은 다시 돌아갈 세상을 꿈꾸며 죽지 않고 버텼지만, 세상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수린이만 그를 믿는다.


수린과 성민


사실 이런 설정에서 수린에게 감정 이입하는 건 어렵지 않다. 딱히 동심을 갖지 않아도 조금만 침착하게 수린이 말을 경청하면, 믿기지 않아도 그 남자가 성민이라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화면 밖에선 이리 간단하고 논리적인 일이, 화면 안에선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 수린을 대하는 어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똑같다. 수린을 걱정하지만 정상은 아니라고 여긴다. 갑자기 동네에 나타난 낯선 남자는 나쁜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실종과 죽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외로운 소녀, 실종된 고아를 사칭하는 젊은 남자는 세상의 상식과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실종된 세 아이


내가 화면 속의 어른이라면, 수린이와 성민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세상이 멈춘 시간 속에서 10년 넘게 살았다는 낯선 이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절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믿진 않아도 그렇게 주장하고 제발 믿어달라고 애원하는 아이의 눈망울은 외면하지 않고 쳐다볼 수 있지 않을까.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진심으로 이해하는 건 다르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짙어져 이해로 이어지면 이해가 믿음이 되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면 세상의 논리에 맞지 않는 헛소리(라고 여겨지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말이 그냥 말장난이 아닌 내 가치관을 반영한 진지한 마음이길 바라지만, 정말 내 앞에 수린이와 성민이가 나타나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한, 이 믿음과 가치관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시간을 건너뛰어 서로를 믿는 두 사람


성민이는 수린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또다시 혼자 십여 년을 살다 온다. 하나뿐인 친구를 위해 절대적인 시간을 희생하고 견딘 것이다. 세상 누구도 그를 믿지 않지만, 오직 한 사람 때문에 그의 고독한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수린에게 믿음은 세상을 부정하는 용기다. 성민에게 사랑은 절대 고독도 감내하는 용기다. 서로에게만 증명되는 두 사람의 판타지는 그들에겐 생생한 현실이고 리얼한 세상이다. 판타지는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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