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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an 10. 2019

인간에게 던지는 개들의 돌직구-언더독

영화 <언더독 THE UNDERDOG> 2018년

※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에서 본 영화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나와 다른 타자(他者)를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 나 아닌 세상 전부가 타자의 잠재적 대상이 된다. 나와 다른 너, 내가 속한 집단 밖의 외부인, 나와 다른 국적과 인종의 사람, 나와 다른 종의 생명체 등. 무엇 때문에 인간은 그들을 소외시키고 차별할까. 아마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테두리를 치고 지키지 않으면 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원초적 공포가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한다. 나의 안전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다른 생명들을 경시하는 구실이 된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며 온갖 생명체 위에 군림하는 인간은 실은 가장 나약하고 위태로운 타자일지 모른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 '뭉치'는 같은 처지의 유기견들을 만나 철거촌에서 지낸다. 인간의 반려견으로 지낸 시간은 개의 본능을 희미하게 했지만, 뭉치는 차츰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한다. 버림받은 상처 때문에 유기견들은 인간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면서도 옛 주인이 준 인형을 간직하고 인간에게 먹이를 구걸한다. 그들의 아지트는 한때 인간의 삶의 터전이었던 철거촌이다. 버림받은 개와 버림받은 집은, 인간이 세상과 다른 생명을 빈번하고 손쉽게 타자화시킨다는 결정적 증거다. 유기견들을 돌보는 것은 외국인 노동자다. 타자를 감싸는 또 다른 타자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 누군가에 의해 손쉽게 내쳐진다.


유기견이 된  '뭉치'


뭉치가 우연히 알게 된 들개 '밤이' 가족은 야수적 본능에 따라 생존한다. 개 공장에서 탈출한 밤이는 인간에 대한 적대감에 철저한 야생을 고집한다. 밤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깨달았을 것이다. 인간에 의해 극단적으로 타자화된 생명, 즉 상품이 된 동물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혹독한 것인지.


들개 '밤이'


이 영화는 같은 종이지만 다른 삶의 양식을 가진 두 집단, 유기견들과 들개들이 극적으로 힘을 합쳐 인간이라는 '공공의 적'을 피해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이야기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유기견에게나 들짐승을 사냥하며 살아온 들개에게나, 그들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인간은 적이고 위험이다. 그들은 지구 상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종일지 모르지만,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생존을 위해 투쟁한다는 점에선 그 어떤 생명체보다 강하고 자주적이다.

애완견으로 살아온 개는 인간의 보살핌을 선택하기도 한다. 유기견 대장 '짱아'가 끝내 인간과 더불어 살길 선택하는 것은 짱아의 자유 의지에 따른 것이다. 생존을 위한 선택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유기견 대장 '짱아'


개사냥꾼에게 개들은 돈벌이용 상품이거나 화풀이를 위한 증오의 대상일 뿐이다. 사냥꾼은 개들을 억압하고 이용하기 위해 그들의 생명력을 쉽게 거세한다. 그건 사악한 한 인간의 개별적 경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가족처럼 지낸 개를 버리는 것과 개 공장을 만들어 생명체를 혹사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나와 다르지 않은 생명이라는 마음이 있다면, 키우기 버겁다고 개를 손쉽게 유기하지 못할 것이다. 개에게 총을 들이대지 않았으니 개를 죽인 게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사료와 같이 버렸으니 굶겨 죽인 게 아니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개를 직접적으로 버린 인간이나 잡아 죽이겠다고 총을 들이대는 인간뿐만 아니라, (본의 아니게) 로드킬 하거나, 개 사육장을 묵과하는 인간 역시 개는 나와 다른 '어떤 것', 내가 알 바 없는 '무엇'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생존을 책임질 순 없다. 하지만 그들이 고통을 느끼는 생명이라는 기본적 인식을 가졌다면 그들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인간이 다른 생명체를 이기적인 이유로 해치는 만행은 너무 간단하게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모험에 나선 유기견들과 들개들


지난한 여정 끝에 개들이 도착한 곳은 비무장지대다. 인간과 더불어 살아온 개들의 지상낙원이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은 개들보다 인간에게 더 끔찍한 비극이다. 인간이 소외시킨 타자가 인간을 배척하는 순간,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처치 곤란한 폭군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다른 종의 생명체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 능력이 없다면, 자신들끼리도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 생명체의 메커니즘은 절대 홀로 살아남을 수 없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싹 밀어내고 주도면밀하게 인간만을 위한 공간이 들어찬 지구를 상상해보면 숨이 턱 막히며 폐쇄공포가 생길 것이다. 개 한 마리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없는 곳은 인간에게도 천국일 리가 없다.


인간을 피해 삶의 여정을 함께 하는 개들


목숨 걸고 인간의 서식지를 탈출한 개들이 비무장지대로 들어가며 보인 눈빛은 경고나 다름없다. '나와 너는 다르지 않은 같은 생명이다, 내가 못 사는 곳은 너희들도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자꾸만 다른 생명체를 소외시키는 인간은 자신이 묻어놓은 지뢰를 밟으며 끊임없이 자폭하고 있다. 개들의 이 눈물겨운 엑소더스는 환호해야 할 해피엔딩이 아니라 엄중한 경고로 받아들여할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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