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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an 16. 2019

그가 사라져야 하는 이유

영화 <The Vanishing of Sidney Hall> 2017년

천재들의 비범함은 고통과 불행 속에서 발화할 때가 많다. 천재로 사는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는 운명의 룰이라도 있는 것인지, 평범한 일상은 그들에게 천재성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난 천재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둔재이지만, 가끔씩 엿보게 되는 남다른 이들의 삶은 부러우면서도 몸서리치게 끔찍할 때가 있다.  


시드니와 멜로디


시드니 홀(로건 레먼 Logan Lerman)은 비상한 감수성과 날카로운 글재주를 지닌 고등학생이다. 당연히(?) 세상은 그의 비범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드니는 자발적으로 아웃사이더가 된다. 집착이 심하고 피해의식이 강한 어머니와 무능한 아버지가 있는 가정에서 천재 소년은 늘 고독하게 날이 서있다. 오로지 멜로디(엘르 패닝 Elle Fanning)라는 소녀가 보낸 편지만이 시드니의 어두운 가슴을 밝히는 한줄기 빛이다.


20대에 유명한 소설가가 되어 퓰리처상 후보까지 오른 시드니 홀이 어느 날 사라진다. 그즈음, 정체불명의 남자가 전국 도서관과 서점을 순례하며 시드니 홀의 소설을 불태우는 기이한 사건이 벌어진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사라진 시드니 홀을 찾던 또 다른 남자는 서점의 방화범이 시드니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그를 추적한다.


천재 작가 시드니 홀


고등학생 시드니가 멜로디를 만나 순수한 사랑을 하며 격정적인 학창 시절을 보내는 이야기와 실종된 시드니 홀을 추적하는 남자의 시선은 일정하게 교차된다. 시드니의 학창 시절부터 따라가다 보면 그가 어떻게 작가가 됐는지, 왜 나중에 자신의 책을 불태우는지, 어째서 유명 작가의 지위를 벗어던지고 세상에서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지 드러난다.


시드니의 첫사랑이자 뮤즈 멜로디


시드니 주변엔 항상 죽음이 떠다닌다. 고등학교 친구 브랫은 시드니에게 무거운 비밀을 밝힌 채 자살한다. 친구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사는 내내 그를 괴롭힌다. 시드니는 친구 얘기를 소설로 써 유명해지는데,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브랫의 환영은 그가 무엇을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원죄가 된다. 아내가 된 첫사랑 멜로디는 남편 그늘에 가려진 삶이 불행하다며 그의 곁을 떠난다. 시드니의 팬이라는 청년은 그의 소설을 읽고 자살한다. 어렵게 마음을 돌린 멜로디가 임신한 몸으로 안타깝게 숨을 거두자, 벼랑 끝을 걷는 것 같던 시드니 홀의 삶은 그대로 무너진다.


시드니의 아내가 된  멜로디


고등학생 시절, 시드니와 친구 브랫


어린 나이에 날카로운 감수성을 드러낸 천재 작가의 사생활은 죽음과 죄책감과 불행으로 얼룩져 있다. 그의 예민한 신경은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행동까지 야기시킨다. 시드니는 집필을 중단하고 떠돌며 자신의 책을 불태우는 기행을 한다. 불우한 천재를 뒤쫓는 남자 역시 (형사를 사칭하지만) 작가다. 그는 시드니와 함께 퓰리처상 경합을 하다 수상한 작가인데, 시드니는 죽기 직전에 손으로 쓴 원고(라고 하기엔 좀 그런, 휘갈겨 쓴 수백 장의 메모지)를 그에게 남긴다.


짧고 굵게 살았다는 표현은 시드니 홀에게 딱 들어맞는다. 그의 날카롭고 예민한 감수성은 세상에서 튕겨져 나갈 수밖에 없는 삶으로 자신을 몰고 간다. 천재들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다운 죽음'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생을 그렇게 불살라버리듯 살다 한순간에 놓진 못할 것이다. 시드니는 먼저 치른 죽음들을 따라잡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라진다.


기행을 하며 세상에서 스스로를 실종시키는 시드니 홀


시드니 홀이 진짜 천재인 것은, 그의 기이한 삶과 업적보다 마지막에 그가 한 행동 때문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줄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진짜 천재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작가가 먼저 시드니를 찾아냈지만, 죽기 직전에 그를 택한 건 시드니다. 자신이 받은 영감과 예리하게 연마한 통찰을 몇 줄로 끄적여놓고 사라진 천재는 남은 작가에게 커다란 물음표와 느낌표를 던져주는 뮤즈가 될 것이다. 실종된 천재를 그가 없는 세상에서 부활시키는 것은 또 다른 천재의 몫이다.


시드니 홀을 추적하는 또 다른 작가


보는 내내 젊은 천재 시드니 홀에게 눈을 뗄 수 없었지만, 그를 추적하는 또 다른 작가의 포스 또한 이 영화를 지탱하는 비범함이라 생각한다. 짧고 격정적인 삶이 주는 메시지는, 아무나 이렇게 살 수 없으니 평범함이 주는 소소한 기쁨을 아끼지 말고 누리라는 것 아닐까. 그래도 천재의 삶이 궁금하긴 하다. (난 평생 알지 못할 그 느낌...) 불행과 고통 속에서 뭔가를 쏟아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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