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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an 19. 2019

인류의 무의식적 공포를 보여주는 우화

영화 <DOWNSIZING> 2017년

나이를 먹을수록 내성이 생기지 않는 건 다름 아닌 공포다. 살아있는 생명이 느끼는 원초적 공포. 죽는 게 두렵다기보다, 죽지 못해 살아야만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절망적인 공포 말이다. 자연재해나 사고를 당하거나, 치명적인 병에 걸리지 않는 한 대부분의 인류는 100년 가까이 산다. 파괴되어가는 한정된 자원에서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건 원초적 공포를 야기한다. 뇌까지 파고들어간다는 미세먼지와 대양을 뒤덮은 거대한 플라스틱 폐기물 고리, 지구 곳곳에 치솟은 쓰레기 산을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당장 내일 이 지구가 어떻게 될 것 같은 조바심마저 든다.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지구가 생명체의 터전으로 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은 허황된 과장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절실한 두려움이 되어 나를 짓누른다. 나도 환경 파괴에 일조했는데도 왠지 억울하고 두렵다.


영화는 인류의 공포를 가장 직접적이고 빈번하게 보여준다.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린 영화들은 SF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사실적이고 타당하다. 외계인이 공격하는 지구는 반신반의하면서 볼 여지가 있지만, 핵전쟁이나 환경 파괴로 인류 절멸의 사태가 될지도 모른다는 설정은 꽤 구체적이고 개연성이 있다.



다운사이징 시술을 받은 친구들을 보는 오드리와 폴


폴 샤프라넥(맷 데이먼  Matt Damon)과 아내 오드리는 평생 같은 집에 사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고 싶어도 대출이 여의치 않다.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죽을 때까지 물려받은 낡은 집에서 그저 그런 수준으로 살 운명이다.


인구 과잉과 환경 파괴에 대한 해결책으로 인간을 축소시키는 다운사이징 기술이 개발된다. 인간의 무게를 2744분의 1로 줄이는 것과 동시에, 재산 가치를 120배 확장시키는 획기적인 기술이다. 작은 신체에 어울릴만한 작은 왕국의 설립은 적은 자본과 자원으로 가능하기에, 재산 가치는 자연히 늘어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모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이 기술은 평범한 사람들이 생의 패러다임을 바꿀 마지막 기회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다운사이징 시술을 고민하는 폴


폴과 오드리는 고민 끝에 다운사이징을 선택하지만, 시술을 마친 폴과 달리 오드리는 막판에 결정을 번복한다. 이미 작게 축소된 폴은 아내의 변절에 충격받고, 작아진 몸만큼 크게 부풀어 오른 자산으로 꿈꾸던 다운사이징 커뮤니티에서의 안락한 삶은 산산조각이 난다. 돌이킬 수 없이 작아진 그는 작은 왕국에서 그럭저럭 적응해 살아간다. 물리치료사였던 원래 직업 대신 고객센터 상담원으로 일하면서.


폴이 대면한 다운사이징 커뮤니티는 그들 안에서는 작은 이들의 소인국이라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이전 사회와 똑같다. 재산 가치가 120배 불어나도 부익부 빈익빈은 여전하고 아시안과 히스패닉계는 여전히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산다. 베트남에서 반체제 운동을 하던 녹란 트란(홍 차우 Hong Chau)은 형벌처럼 강제로 다운사이징 시술을 받고 추방된 케이스다. 인류의 번영과 환경 파괴를 늦추고자 개발된 이 기술이 어떤 나라에서는 처벌과 탄압의 도구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다운사이징 시술을 받고 작아진 인류


지금보다 더 행복하기 위해, 덜 파괴적이고 덜 경쟁적으로 살자고 개발된 다운사이징은 개발자들의 의도와 달리 세계의 축소판일 뿐이다. 인류의 이기심과 이타심은 사이즈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코끼리만 하든 개미만 하든 개별적으론 이기적이면서도 전체적으론 인류애를 지향하는 이타심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시술을 받은 자들은 과감하고 선지적인 신인류라도 된듯한 기분에 잠깐 도취되었을지 모르지만, 세상은 사이즈가 달라졌다고 양상까지 변하진 않는다. 그들 사이에선 사실 사이즈의 변화도 실감하지 못한다. 타조만한 모기가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빗방울 하나가 양동이에서 쏟아붓는 물로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원초적 괴리는 영화 「아이가 작아졌어요」나 「엔트맨」에서 충분히 숙지했기에, 「다운사이징」을 대하는 관객들은 좀 더 나아간 선험적 인류 사회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그 선험적 사회라는 것이, 어처구니없게도 지금 내가 사는 세상과 너무 똑같다. 보는 관객도 이렇게 허탈한데, 그 속에서 살아야 하는 작아진 신인류들은 오죽할까 싶다.


녹란 트란과 폴


다운사이징 커뮤니티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그로테스크한 시술을 받아야 한다. 이 영화의 실질적인 압권은 바로 이 시퀀스다. 당사자들은 마취 상태라 모르겠지만, 전지적 시점으로 본 그들의 시술 과정은 끔찍하기보다는 매우 기이하게 차갑고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알몸 상태로 마취시켜 온 몸의 털을 밀어버린 후, 금이빨 같은 보정물을 제거한다. 개체가 축소되는 과정에서 인간 본연의 몸이 아닌 이식된 이물질은 작아지지 않고 폭파한다는 물리적 근거에 의한 시술이다. 아마 가슴에 보형물을 넣은 여성이나 관절에 철심을 박은 사람, 인공심장을 지닌 사람들은 당연히 이 시술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금이빨처럼 뺐다 작아진 후 다시 해 넣을 수 있다면 모를까. 이 그로테스크한 과정은 인간을 차가운 선반에 올려놓은 물건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게 만든다. 시술이 끝나 작아진 개체들을 작은 쓰레받기 같은 걸로 떠다 침상에 옮기는 장면은 인간이 벌레나 실험실 모르모트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폴은 다운사이징 커뮤니티에서 만난 남자 듀샨과 베트남 여인 녹란과 함께, 이 기술을 처음 개발하고 인류에 전파시킨 노르웨이 과학자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그가 환경 파괴로 멸망이 목전에 닥친 인류를 위해 노아의 방주처럼 지하 벙커를 만들어 한정된 인류와 자원과 함께 사라지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끝은 없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간은 어떻게든 멸족하지 않으려고 온갖 지혜와 궁리를 짜내고 실험한다. 폴은 선험적 인류를 따라 지하벙커까지 들어갔다 다시 나온다. 그는 미지의 유토피아보다 변하지 않는 이 세상, 디스토피아에 남기로 결정한다. 베트남 여인을 사랑하게 된 그에겐, 혼자 살아남은 (잠정적) 천국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확실한) 지옥이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여인 녹란 트란


이 영화는 꽤 개연성 있는 미래 사회상을 제시하고 다소 엉뚱하게 마무리지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폴은 어떤 인간이 된 것인가. 혹시 작아진 걸 후회하진 않을까. 다운사이징 기술은 인류 발전과 생존 연장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는가. 다운사이징 사회의 문제점과 부작용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지하 벙커는 진정한 인류의 피난처가 될 수 있을까. 다운사이징 철학자들은 이전과 다른 (작아진) 인류와 원래 인류 사이에 어떤 소통을 제시할 것인가. 같지만 다른 두 인류 사이에 차별과 소외는 어떤 식으로 야기되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많은 질문을 남발하게 하지만 답은 어디에도 없다. 답에 대한 힌트조차. 문제 제기만으로, 선험적 인류 생활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남다르다 할지 모르지만, 충격적인 축소 시술 장면 뒤로 슬그머니 사그라드는 문제의식은 못내 아쉽다. (작은 왕국 내에서의 갈등은 꼭 다운사이징 커뮤니티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세상 풍경 같아 좀 맥이 빠진다. 기존의 인류와 작아진 사람들의 갈등 또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솔직히 내가 이런 설정의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했는지 조차 모르겠다. 획기적인 인류 실험이 처절하게 망하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선험적인 인류의 모험이 갈등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인가.


폴은 다운사이징 시술을 받은 걸 후회하지 않을까...


다운사이징 기술을 개발하고, 지하벙커를 만들어 인류 생존을 염원하는 늙은 과학자가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며 한탄하듯 하는 말이 그나마 기억에 남는다. (기술을 개발하고 실용화하는 덴 몇십 년이 걸렸지만) 서너 시간 만에 축소 시술을 감행하고, 그러면서도 행복하지 못하고 위협당하는 인간이 내뱉는 씁쓸한 한탄이다.

 


자연은 인내심이 강한 조각가예요.
아주 천천히 수천 년을 깎아내려 이런 장관을 만들어 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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