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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an 23. 2019

16세가 성장시킨 46세

영화 <증인> 2019년

※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에서 본 영화입니다.  


모든 일엔 때가 있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적절한 타이밍에 하면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도 있지만, 평생 해도 완성되지 않는 일엔 '때'가 없다. 공부와 성장엔 때가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신체적 성장은 성인이 되면 멈추고 퇴화하지만, 정신적 성장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멈출 수 없는 영적 활동이다. 이제 그만 됐다고 해서 멈추는 것도 아니고, 더없이 높은 이상적 상태를 꿈꾼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을 때까지 배우고,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궁극적 목표로 삼아야 할 생의 도전이 아닌가 싶다.




양순호(정우성)는 40대 중반의 변호사다. 억울한 사람을 대변하고 돕는 업에 종사하지만, 그의 삶은 그가 변호하는 이들보다 더 억울하고 피곤해 보인다. 혼자 계신 늙고 병든 아버지 부양과 갚아야 할 빚은 '변호사 양반'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 어울리지 않게 삶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민변 시절의 소신과 이상은 제쳐두고, 직장에서 인정받아 안정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 순호에게 어느 날 사건이 떨어진다. 프로보노(무료 변론) 사건으로 살인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는 자페 스팩트럼이 있는 16세 소녀 임지우(김향기)다.


무료 변론을 하게 된 양순호 변호사


순호는 이 사건을 승소해 파트너 변호사가 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쉽진 않지만 비교적 명쾌한 사건이다. 신빙성을 장담할 수 없는 증인의 증언만 잘 컨트롤한다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임지우


순호의 업무 성과는 탁월하다. 의뢰인을 신뢰하고 논리적 추론으로 살인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해 나간다. 그가 한때 소신을 같이 했던 대학 동기 앞에서 (자신의 담당은 아니지만) 회사 고객인 대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속물적인 기회주의자로 보이지만, 그의 논리와 합리성은 크게 나무랄 데가 없다. 그의 말대로 융통성을 갖고 세상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페 스팩트럼을 가진 지우에게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순호


자페 소녀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순호가 아이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목적이야 어떠하든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아저씨로 보인다. 혼자만의 세상에 사는 지우와 소통하기 위해 공부하고 아이 눈높이로 허리를 구부려 눈을 맞추는 자체만으로도 훈훈하다. 지우가 순호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고 소통할 때는 뭉클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법정에 증인으로 세운 지우에게 순호가 몰아붙이며 내뱉은 발언은 충격적이고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상처가 되기에 충분하다. 정상이 아닌 아이의 증언은 효력이 없다며, 지우가 공감 능력과 판단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반사회적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순호의 모습은 잔인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한 잔인한 언행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양순호의 잘못은 무엇일까. 어린 자페 소녀를 법정에 세워놓고 비정하게 모욕한 것? 의뢰인의 거짓말을 알아보지 못한 것? 출세에 눈이 멀어 소신을 버리고 속물이 된 것? 개인적으로 양순호라는 남자의 잘못은, 일부러 세상의 때를 묻히려 자신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만이 안정적이고 성공한 삶이라 왜곡하고 타협한 것이 순호의 치명적인 실수다. 그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누가 이렇게 살고 싶어 그랬나, 아버지와 빚은 어떡하라고. 40이 넘도록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하는 처지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순호와 아버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서 책임감 있는 40대로 번듯하게 살아보겠다는 그는 정상 참작을 할 만한 죄인이다. 소신을 버려서 홀가분하다면 쭉 그런 놈으로 살면 된다, 진실이나 양심 따윈 접어두고. 그러나 순호는 변절자 취급하며 이제 그만 보자는 대학 동기의 말에 상처 받는다. 그의 몸은 이쪽에 있지만 소신은 아직 저쪽에 있다. 파트너로 승진하고 싶지만, 양심에 반하는 변론은 할 수 없다. 양순호는 그런 남자다. 양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인간적이어서 속물일 수밖에 없는 사람.


엄마에게 다시 법정에서 증언하겠다고 말하는 지우


항소심 공판에서 순호가 변호사법까지 위반해가며 의뢰인의 이익엔 반하지만 진실과 정의에 가까운 변론을 하는 장면은 통쾌하지만 조금 찝찝하다. 저렇게 중요한 정황 증거를 왜 이제야 알았을까 싶다. 지우가 비상한 기억력과 예민한 청각을 가졌다는 걸 모르지 않았는데, 검사나 변호사 양쪽 모두 증인으로부터 중요한 정황 증거를 체크하지 못했다는 게 어이 없다. 그 부분만 빼면, 이 영화는 이질적인 두 사람이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과정이 아기자기하고 감동적으로 전개되는 아름다운 동화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순호는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라는 지우의 물음에 각성한다. 그 누가 이런 질문에 쉽고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아니, 이런 질문을 대놓고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 있을까, 지우 말고?


순호는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지려고 노력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분명하다. 양순호라는 사람의 성장은 이 시점에서 다시 시작된다. 잠시 멈추고 퇴화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정신적 성장판은 닫히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때가 시커멓게 묻어 성장판이 아예 닫혀 퇴행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지우라는 미지의 소녀는 그에게 세상의 다른 쪽을 보여주는 창문이자 그가 잊고 있던 가능성과 소통을 체험하게 하는 선생님이다. 극단적인 자기만의 세상을 갖고 있는 지우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 어떤 의뢰인과도 소통하고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일종의 자격증이 되기 때문이다.


순호는 그동안 건성으로 흘려듣던 아버지의 진심도 편지를 통해 새겨듣는다. 누구보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조언하는 아버지의 간곡한 마음은, 지우 엄마가 지우를 (자폐가 없는 아이였다면 하는 상상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모습과 상통한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지우의 질문에 순호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지우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순호는 지우라는 이질적 존재로 인해 각성하고 성장한다. 일부러 무언가를 주입하고 티 나게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삶의 방향키를 서서히 돌려주는 바람처럼 아이는 어른의 생을 그렇게 전환시킨다. 성장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지만, 어른을 아이로 만들기도 한다.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어른으로 산다는 건, 영원히 크지 않는 아이로 사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수 있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일 지도 모른다.


지우가 자기만의 세상과 외부 세계를 넘나들며 나름의 질서로 조화롭게 살 수 있다면, 순호 또한 소신과 양심을 최대한 지키면서 세상의 이익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세상을 꿈꾸게 하는 뒷맛은 이 이야기가 현실이 아닌 판타지라는 각성을 하게 하며 서글픈 여운을 남긴다. 판타지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울수록 더 쓸쓸한데, 이 영화 <증인>은 그런 면에서 아름다운 해피 엔딩이지만 조금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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