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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an 27. 2019

평범하기 위해 특별해진 사랑

영화 <FREEHELD 로렐> 2016년

강인하고 소신 있게 산 여자들을 보면 경이로울 때가 있다. 그들이 타고난 위인이나 위대한 여정을 살아서가 아니라 나는 하기 힘든 일을 했을 때, 평범한 일상에서 작은 용기로 세상을 바꾸는 걸 볼 때 가슴이 뭉클하다.     


로렐 헤스터


로렐 헤스터(줄리안 무어 Julian Moore)는 위험한 임무도 거뜬히 해내는 23년 차 베테랑 경찰이다. 뉴저지 최초로 여성 서장을 꿈꿀 만큼 성과가 탁월하고 동료들에게 신망도 두텁다. 레즈비언인 그녀는 보수적인 경찰 조직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지내는데,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낯선 동네 배구 클럽에서 스테이시(엘렌 페이지 Ellen Page)를 만난다. 호감을 느낀 두 사람은 연인이 되어 함께 살며 행복한 일상을 만끽한다.


연인 '로렐과 스테이시'


그러던 어느 날, 로렐은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치료하지만, 로렐은 점점 악화되는 병과 싸우면서 마지막 순간을 위해 자신의 사후 연금 수령인을 파트너 스테이시로 인정해줄 것을 의회에 요청한다. 하지만 뉴저지 의회는 스테이시와 로렐의 관계가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락하지 않는다. 로렐은 동료 데인의 도움을 받아 주의회 주민 공개회의에 참석해, 동거인 법에 의해 자신의 동거인으로 인정받은 스테이시에게 연금 수령할 자격을 달라고 호소하지만 장벽 같은 관행과 보수적 관념으로 똘똘 뭉친 의회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행복을 만끽하는 두 사람


이 와중에 게이 인권운동가 스티븐(스티브 카렐 Steve Carell)은 로렐의 케이스를 언론에 노출시키며 인권운동에 이용한다. 로렐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언론과 여론에 당황하며 몹시 힘들어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꾼 집과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연금을 스테이시가 수령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평생 레즈비언이라는 걸 밝히지 않고 살아온 그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대대적으로 커밍아웃할 수밖에 없을 만큼 절박하다. 마지막 힘까지 짜내어 싸우는 그녀의 모습에 스테이시는 그만하라고 하지만, 로렐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소중한 사람을 위해 간절하게 투쟁한다.  


커밍아웃을 하고 투쟁하는 로렐


로렐은 평범한 중년 여자다. 자신의 일에 적극적이고 동료들을 배려하는 건강한 사회인이다. 그녀가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밝히지 않은 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찰 조직에 일으킬 파문과 편견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 '두려움'과 '회피'는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과는 별개로, 모든 걸 투명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어떤 반응이 올지, 어떤 시선과 대우가 기다릴지 뻔히 아는데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게이 인권운동가 스티븐


로렐의 우려가 괜한 걱정이 아니라는 건 지체 없이 드러난다. 그녀를 따르고 존경했던 경찰 동료들도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걸 안 순간 묘하게 비틀린 반응을 보인다. 가장 크게 동요하는 건 파트너 데인이다. 자신에게까지 숨겼다는 배신감과 그동안 (평범한) 여자 동료로 대했던 심정 때문에 황망해한다. 그런 그가 죽어가는 로렐을 보며 마음을 돌리고 동료들까지 설득하며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모습은, 인간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자연스럽지만 쉽지 않은 선의다. 로렐의 소식에, 조직 내 남자 경찰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씁쓸하지만 엄정한 현실이다. 병든 동료에 대한 연민과 (여태껏 감쪽같이 속인) 레즈비언에 대한 혐오는 한 여인에게 쏟아붇기엔 매우 힘들고 이질적인 감정이다. 그들이 혼란스러워하고 못마땅함을 표출하는 건 바람직하진 않지만 일면 보편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이 마음을 바꿔 로렐 편으로 돌아설 땐 더욱 뭉클하다. 그 어떤 편견도 오랜 시간 함께 한 동료에 대한 존경과 연민보다 강하진 못할 것이다.  


동료 경찰 데인 & 로렐과 스테이시


게이 운동가 스티븐도 처음엔 로렐의 케이스를 이용할 궁리만 하는 듯하지만,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에 마음을 움직인다. 무엇보다 주민들과 꼰대 같은 의회를 움직인 건 그녀의 연약하지만 명확한 호소다. 로렐이 주장한 건 딱 하나다.


"나는 평등을 지지합니다."


그녀는 암환자로서 특별한 대우를 원한 것도 아니고, 20년 넘게 목숨 걸고 근무했으니 봐달라고 호소하는 것도 아니다. 스테이시가 남자였다면 논의할 필요조차 없는 연금 수령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받지 못하게 하는 '특별 대우'를 하지 말아 달라는 호소다. 세상은 그녀를 '암투병 중인 레즈비언 경찰'로 특별하게 못 박지만, 그녀는 오로지 '평범한 평등' 그 하나만을 주장한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특별하게 보지 말라고, 23년 근무하다 투병 중인 경찰, 죽으면 동거인이 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회인으로 남게 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녀가 요구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평등은 결국 관철된다. 이 당연한 평등을 위해 그녀는 마지막 숨까지 짜내어 싸워야 했다. 이 실화가 영화화될 정도로 그녀의 여정은 험난했을 것이다. 먼저 다큐멘터리로 나온 이야기가 영화로 제작될 수밖에 없을 만큼, 아직도 세상엔 억울한 로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평범함'에서 빗겨 난 '특별함'으로 규정짓는다면, 먼저 질문에 대답부터 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그 평범함은 누굴 기준으로 하는 것인가. 동성애자들이 볼 땐, 이성애자야말로 특별한 이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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