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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an 30. 2019

국가가 재난이 된 스릴러

영화 <국가 부도의 날 Default> 2018년

대다수의 개인은 무력하다. 무지하고 미약하다. 우리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한 나라의 국민이고 지역 사회 일원이며 가정에 소속되어 있다. 온전히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건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가끔 폐쇄 공포가 느껴질 정도로 나를 둘러싼 시스템이 견고한 장벽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그 장벽의 비호 아래 안전과 생존을 보장받기도 한다. 보호와 강제는 종이의 양면처럼 붙어서 개인의 생존을 담보로 책임과 희생을 규정한다. 문제는,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소속과 시스템이 강요하는 희생이 때로 말할 수 없이 참담하고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투자자들은 한국을 떠나라. 지금 당장!


1997년, 당시엔 잘 몰랐지만 그 후유증을 알게 모르게 겪으며 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국가 부도 위기 IMF 사태를 돌아보는 일은 황망하다. 나 또한 그 사태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1997년 초겨울 어느 날 갑자기 일을 못하게 됐다. 오래됐지만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다. '이게 다 IMF 때문이야~'라는 말로 모든 게 퉁쳐졌다. 그때 내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은, '왜 나만?'이었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내 또래 중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계속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 나만 예고도 없이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소릴 들어야 하는지 억울했다. 개인적 불행은 나의 눈과 귀를 막아버렸다. 시간이 좀 흐른 뒤에야 '나만'이 아니라 '나도'였다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에서 떨어지는 사람들 주위엔 별 탈 없이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난 그중 한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


중소기업 사장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갑수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대한민국 역사를 바꾼 초유의 사태를 싸늘하고 냉정하게 보여준다. 몇몇 위정자와 국가 위기 사태의 대책을 논의하는 인물들은 시종일관 무겁고 창백한 톤으로 보인다. 그래서 더 무섭다. 이들이 그려내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지나간 과거가 유령이 되어 현재에 나타난 것 같아 소름 끼친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대한민국 최고의 경제 호황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1997년, 희망적인 뉴스와 달리 나라 곳곳에서는 위기 시그널이 포착된다. 국민소득 1만 달러 달성, 대한민국 OECD 가입을 전하는 뉴스가 국가 부도를 예고하는 반전이 되기까진 채 며칠이 안 걸린다. 중소기업의 부도가 속출해 서민들 생활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엄청난 경제 위기가 닥칠 것을 예견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은 이 사실을 청와대에 보고한다. 정부는 외환 보유고가 간당간당하다는 걸 알고 뒤늦게 채무불이행(DEFAULT), 즉 국가부도 사태를 막기 위해 비공개 대책팀을 꾸린다.


위기를 발 빠르게 직감한 금융회사 직원 윤정학(유아인)은 국가 부도에 투자하는 역베팅을 계획하고 투자자들을 모은다. 국가가 부도나다니, 그럼 정부는 손 놓고 있겠어? 한 투자자의 상식적인 의견에 윤정학은 날카롭게 대응한다. 정부는 거짓말로 사태를 은폐하고 나중에 국민들에게 뒤집어 씌울 거라고. ‘니들이 사치하고 낭비해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려서 나라가 이 지경이 됐다고’ 말이다. 그의 불길한 예언은 알다시피 적중한다.


이런 와중에 작은 공장의 사장 갑수(허준호)는 대형 백화점과 어음 거래 계약을 한다.


위기를 직감한 금융회사 직원 윤정학


국가부도까지 남은 시간 일주일


비상대책팀 내부에서 위기대응 방식을 두고 한시현과 재정국 차관(조우진)이 강하게 대립한다. 끝까지 국민을 속이고 국가 위기 사태를 쉬쉬하며 거짓 뉴스를 보내는 차관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행태에 한시현 팀장은 분노를 삼키며 이성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번번이 묵살당한다. 한시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차관은 협상을 위해 IMF 총재(뱅상 카셀 Vincent Cassel)를 극비에 입국시킨다.


IMF 총재


한국은행 외환 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는데 왜 작은 공장이 부도나는가. 이 간단한 질문에 금융맨 윤정학은 아주 쉽고 명쾌하게 답한다. 왜 대한민국이 조만간 부도날 수밖에 없는지, 100대 기업 중 스무 곳이 넘는 회사가 며칠 안에 도산하고, 집값은 30% 이상 내리며, 달러는 지금의 세 배로 오를 수밖에 없는지를. 경제에 무지한 나도 그가 침 튀기며 하는 설명을 듣고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된다. 그래도 설마 나라가 부도나겠어하며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 '설마' 때문에 국민들은 위정자들에게 속고, 무고한 생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실 국민들도 알았을 것이다. '설마'가 아니라, '제발'하는 심정으로 믿고 싶은 (가짜) 뉴스에 의지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대한민국은 난파선이고 어차피 이 배에서 못 내릴 운명이라면, 난파한다는 기정사실보다 태풍이 사라질 거라는, 아니 아예 없었다는 가짜 희망에 의지하고 싶었다는 것을.


한시현은 끝까지 IMF의 개입은 막아야 한다고, 나라의 경제 주권을 빼앗겨 강대국 입맛에 맞게 시장과 국가 경제를 재편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가 아는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한국 경제 관료들이 IMF 협상팀의 굴욕적인 제안을 아무 제제 없이 받아들이는 장면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치욕적이다. 내가 사는 나라가, 나의 나라가 저런 나라이고 저런 사람들에 의해 운명이 갈리는 공동체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새삼!!!)


위기를 막으려는 사람과 위기에 베팅하는 사람, 그리고 회사와 가족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이 씨줄 날줄처럼 엮여서 겪어낸 1997년과 그 이후의 삶은 우리가 아는 바 대로 흘러간다.


IMF의 협상안을 받아들이는 경제 수석


재정국 차관의 바람대로, 대한민국의 경제와 노동시장은 이 기회에 체질개선을 해버린다. 선진국의 경제 식민지가 되어버린 한국은 자본 시장이 개방되어 외국인 투자가 확대된다. 고용이 불완전해진 노동 시장엔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해고가 용이해진다. 이제 평생 고용과 평생직장은 역사책 속의 낡은 개념이 되어 버렸다. 마구잡이로 들어온 외국 자본에 의해 구조조정이 쉬워진 기업은 실업자를 양산하고 중산층은 무너졌다. 물론 경제 체질 개선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는 건 무식한 나도 안다. 세상에 완전한 악과 선은 없으니까. 모든 일엔 양면이 존재하니까.


재벌과 기득권을 대변하는 재정국 차관


IMF 사태 이후 20년이 지난 현재를 보여주는 마지막 시퀀스는 이 영화의 암울한 색깔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한국의 자본시장을 간파한 윤정학은 투자의 귀재로 승승장구한다. 선량한 중소기업가 갑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소리 지르는 사장이 되어 있다. 20년 전에 자살하지 않고 눈물을 삼키며 살아남은 그가 비정한 세상에서 어떻게 생존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아들은 과거에 나라를 IMF에 지체 없이 넘긴 재정국 차관이 운영하는 투자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간다. 독한 고용주가 된 아버지와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종사하는 노예가 되길 희망하는 아들은 그렇게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의심해라!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뻔한 환상이 얼마나 낯 뜨거운 거짓말인지 이 영화는 새삼 보여준다. 국민은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무지해야 하며 알려고 해선 안된다고 역설하는 듯하다. 몇몇 윗대가리들의 자의적 판단과 명분이 한 나라를 좌우하고 수많은 국민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는 (더 이상 새롭지도 않은) 팩트는 이 영화를 그 어떤 공포물보다 소름 끼치는 재난 영화로 만들었다. (별로 있지도 않았던) 애국심을 한방에 소멸시키는 이 영화는 전 세대가 봐야 할 스릴러다. 그렇다고 두 번 다시 속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속더라도 어떤 놈들에게 어떤 식으로 속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그때처럼 가장 늦게 깨달아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냉소를 부추기는 이 영화는 내가 근래에 본 가장 끔찍한 공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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