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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an 08. 2019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책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2018년

비밀은 음침하고 은밀하다. 조용하지만 무서울 때도 있다. 선입견일지 모르지만 비밀은 만드는 것보단 안 만드는 게 낫고, 혹 만들었다 해도 간직하기보단 털어버리는 게 삶의 질을 높인다고 생각했다. 사는 내내 비밀 없이 투명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런 삶이 딱히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한가한 소리 같지만, 요새는 (대단한 것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비밀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것도 감출 게 없다는 건, 소중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나쁜 내력이나 추악한 진실만 비밀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 혼자만 꺼내보고 싶은 무엇인가를 간직하면 삶이 더 깊어지지 않을까. 추억보다는 강렬하고 기억보다는 강제적이고 필사적인 어떤 것, 그런 비밀 말이다.   


미야모토 테루의 장편 소설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는 제목의 느낌처럼 섬세하고 다정한 이야기다. 오래전에 일어난 여자아이 유괴 사건을 파헤치는 후일담 치고는 참 서정적이다. 범죄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미스터리 한 구성이지만, 딱히 악인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따스해진다. 과거에 생성된 비밀은 슬프고 가슴 아프지만, 왠지 안도의 숨이 나오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한 아이의 유괴사건의 진실이 아름다울 수 있다니. 이 소설의 미스터리한 힘일까, 아니면 비밀의 정체성 때문일까.


전도유망한 30대 남자 오바타 겐야는 미국에 사는 고모 기쿠에가 사망하며 남긴 저택을 포함한 유산에 깜짝 놀란다. 자그마치 400억 원 정도이니, 보통 사람은 듣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릴만한 규모다. 명민한 청년 겐야는 유산에 눈독 들이는 대신, 고모의 변호사에게 들은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어릴 때 병으로 죽은 줄 알았던 고모의 딸 레일라가 실은 유괴로 실종 상태라는 것. 20여 년이 훨씬 지난 일이라 찾는 것을 포기했다는 말에, 겐야는 고모의 유언장을 다시 살펴본다. 레일라를 찾게 되면 유산의 70%를 레일라에게 상속하고 나머지를 겐야에게 준다는 내용이 초안이었지만, 수정된 유언장엔 레일라에 대한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 겐야는 고모가 내심 레일라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저택을 살펴보며 고모의 의중을 파악하려 한다.


정말 이상하지만 바람직하게도 이 이야기엔 악인이 나오지 않는다. 오래전 유괴된 소녀를 찾겠다는 계획은 소녀의 얼굴도 모르는 사촌 겐야에서 시작한다. 레일라가 나타나면 그의 유산이 대폭 줄어드는데도 그는 고모의 실종된 딸을 찾겠다고 결심한다. 보통 사람은 하기 쉽지 않은 생각이다. 꼭 사악하거나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20년이 훨씬 지난 미제 사건은 해결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유괴된 아이를 새삼 다시 찾지 않겠지만, 겐야는 고모가 알듯 모를 듯 남긴 미세한 단서를 꿰맞춰가며 실마리를 풀어간다. 그가 고용한 사립탐정, 사립탐정을 추천한 변호사, 그리고 키쿠에의 어둡지만 뜨거운 비밀이 은연중에 드러나게 도와주는 정원사까지 모두 말없이 이심전심으로 협업한다. 이들 중 유괴 사건의 전말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이들은 세상에 없는 집주인과 그 집과 정원을 물려받은 남자,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와 집주인의 친구가 합작해 자칫 묻힐 뻔한 안타깝고 슬픈 한 엄마의 비밀을 밝혀낸다.


비밀은 역시 음침하고 은밀하다. 그게 아니면 비밀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갑자기 세상의 빛 아래 드러난 진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비밀의 당사자인 레일라만 모르는 아름다운 비밀의 카르텔이 은연중에 형성된다. 비밀이지만 비밀이 아니게 된 진실은, 한 여자의 행복한 운명을 바꾸지 않을 정도로만 간직될 것이다. 언젠가 키쿠에가 비밀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진심이 전달되겠지만, 당분간은 그 누구도 진실을 떠벌리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악인이 없는 이야기에선 모두가 선의를 향해 달려간다. ‘레일라’라는 소중한 존재의 행복을 위해.


장편 소설이 변변한 악인 하나 없이 꾸려지고 흐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이 이야기는 촘촘하게 전개된다. 겐야가 고모에게 물려받은 대저택의 묘사와 정원의 세세한 풍경은 자칫 지루할 수도 있었는데, 왜 이런 묘사가 필요했는지 나중에 깨닫고 아차 싶었다. 기쿠에가 조카 겐야에게 학비까지 보태주면서 미국 유학을 고집하고 지원한 것도 예사롭지 않은 예견이었단 생각이 든다. 거베라 화분에 담긴 비밀은 가슴 아프지만 아름답다.


거베라


자식을 위해, 자식의 묘석이 되어 살기로 맹세한 엄마의 비밀은 세상이 지켜줘야 한다. 이 이야기의 후일담은 몹시 궁금하지만 그래서 알고 싶지 않다. 기쿠에 올컷의 비밀은 아름답지만 잔인하다. 그녀가 엄마가 아니었다면 절대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풀꽃들에게 레일라의 행방을 묻는 겐야의 순수한 선의 또한 기쿠에의 모성 못지않게 절대적이다. 이 이야기는 엮기 힘든 사람들의 선의를 풀꽃들의 속삭임처럼 소소하게 잘 엮어서 펼쳐놓는다. 작가는 대체 어떤 마음을 지닌 사람인가, 새삼 궁금하다. 그에겐 어떤 비밀이 있는지, 그것 또한 몹시 궁금하다. 가슴 아픈 비밀은 사절이지만, 역시 비밀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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