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이스 Jan 04. 2019

악마를 보았다!

책 <해리 1, 2> 공지영 장편 소설, 해냄, 2018년

난 원칙적으로 작가의 작품과 사생활은 별개라 생각한다. 허구의 문학 작품은 작가 개인사와 연관 짓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작품과 작가의 사생활을 분리하긴 쉽지 않다. 개인적 목소리를 활발히 내는 작가라면 더욱더 그렇다. 장편 소설 『해리』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공지영 작가는 특유의 어조로 신념을 밝혔다.    

"우리가 향후 몇십 년 동안 싸워야 할 악은 진보와 민주의 탈을 쓴 엄청난 위선이 될 것이라는 작가로서의 감지를 이 소설로 형상화해 보았습니다"


그의 소설『도가니』를 읽지도 (영화를) 보지도 않았지만, 『해리』에서 불쑥 드러나는 '도가니'의 잔재는 작가가 이런 류의 사회 문제와 비리를 밝히는데 나름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좋게 말하면 그렇고 약간 비딱하게 말하면, 독자의 공분을 살 만한 사회악을 들춰내 까발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듯하다. '도가니'를 접하지 않았어도, '해리'는 그보다 한 수 위인, 훨씬 주도면밀해진 악의 세력과 대적한다는 느낌을 준다.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독자들을 거대한 악의 소굴로 이끄는 작가의 문장은 이 책의 실제적 악(惡) 못지않게 두려우면서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소설은 실제 재판 중인 봉침 목사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한국의 마더 테레사라는 여성 목사의 숱한 의혹들과 천주교 사제와의 부적절한 관계, 그들이 운영하던 장애인 복지센터의 부정부패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지 않아 실제 사건은 자세히 모르지만, 봉침 목사 사건의 개요가 곧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신체 특정 부위(당신이 상상하는 바로 그 부위)에 봉침을 놓으며 남자들을 제 멋대로 휘두르는 이해리와 그녀의 내연남이자 가톨릭 신부복 안에 욕망과 위선을 감춘 백진우 신부가 악의 축이다. 진보 성향의 인터넷 매체 기자 한이나는 고향 사람들인 이들과 어렸을 때부터 잘 아는 사이로, 그들의 악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맞선다.


장애인 주간 보호센터를 운영해 돈을 긁어모으고, 봉침으로 현직 권력자를 비롯해 지역사회 유지들까지 주무르는 해리의 파렴치한 성녀 코스프레와 이중인격 행위는 내가 당한 게 아니더라도 처죽이고 싶을 만큼 생생한 악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기가 막힌 건, 해리가 악의 피라미드 제일 하단이라는 것이다. 그녀를 조종하고 이용하는 백진우 신부의 뻔뻔한 고해성사와 적반하장은 가톨릭이란 종교에 대해 회의마저 일으킨다. 그를 옹호하다 이해관계에 따라 내치는 천주교 내부의 움직임과 반발, 그와 직간접적으로 연관 있는 수녀들의 이해할 수 없는 침묵과 비호는 '종교가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다른 식으로 되짚어 보게 한다. (마르크스는 종교의 타락을 빗대어한 말이 아니지만, 침묵의 카르텔을 고수하는 천주교에 대한 적개심에 종교가 아편보다 더 유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리에게 놀아나는 권력자들과 이를 비호하는 공권력의 행태는 욕이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깊은 절망감을 안겨준다. 눈을 가린 채 악행을 선의로 착각하는 대중들의 우매함은 내가 그런 대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자아낸다.


백진우와 이해리...
그들은 영혼의 쌍둥이예요.
숨 쉬는 것까지 모두가, 거짓입니다.


밥 먹듯 거짓과 악행을 하는 게 아닌, 숨 쉬는 것까지 거짓인 사람들에게 평범한 사람들은 대적하기 쉽지 않다. 악에 영혼이 오염되어 악에 대한 감수성마저 없을 것 같은 그들에게 보통의 상식과 평균적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손쉬운 먹잇감이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을 비롯해 평범한 사람들을 사악하게 우롱하고 뼛속까지 우려먹는다.  


이 소설은 악의 실체뿐만 아니라, 그 악을 비호하고 양산하는 세력들의 더러운 협잡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진보의 가치를 내세운 새로운 공권력은 지난 시대의 낡은 가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새로운 악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결국 가치의 성향이 무엇이든, 권력자들의 비리와 부패는 썩은 주검보다 추악하고 싸늘한 입김으로 시민의 삶을 파괴한다. 이 새롭고 거대한 악에 맞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투쟁은 속이 터질 정도로 답답해 보인다. 뭔가를 밝혀내고 고발하면 맞고소로 이어지고, 비리와 부패는 드러날 듯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다. 천신만고 끝에 악행을 폭로해도, 세 치 혀와 성자 코스프레로 이미지는 순식간에 뒤집힌다. 대중들과 소통하는 SNS는 빠르고 편리한 만큼 왜곡되고 이용당하기 쉽다. 작정하고 덤비는 그들의 실체를 모르는 대중들은 허상에 속으며 자신도 모르게 악을 비호하는 우를 범한다.  


왜 빨리 악을 처단하지 않냐고, 속 시원한 응징은 대체 언제 할 거냐고 분통을 터뜨릴 수 없는 게, 이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니, 현실은 가공의 이야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란 불길한 예감까지 든다. 대체 인간은 무엇이며, 세상은 어떤 곳인가. 인간이 인간을 두려워하게 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런 현실은 똑바로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회의주의에 빠지게 한다.

 

이 소설이 나오는 과정에서 작가가 자료를 수집하면서 생긴 잡음과 개인적 행적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실제 사건이 모티브인 만큼 사건 당사자들의 반격과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의 완성도나 미진한 결말, 현실과 허구의 모호한 경계는 따지고 싶지도 않고, 그럴 능력도 없다. 그동안 내가 모르는, 혹은 모른 척했던 악의 카르텔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책의 문장들이 기가 막힐 뿐이다. 약간 고무적인 건, 난 SNS에 몰입해 살지 않은 덕에 무지로 인한 악행에 가담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악에 동조하는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의 한 축이라는 자괴감도 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소설은 이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나오는 게 안 나오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게 아닌가 싶다. 악을 처단하는 행위에 직접 가담할 순 없었도, 치 떨려하며 공분하는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작가가 쓴 가공의 문장이 아니라, 그가 인용한 문구가 더 인상적이다.


도대체 왜 악이 역사 안에서 그렇게 열매를 많이 거두는가?

그것은 “역사를 지배하는 악의 힘이 더 강력한 것도, 악이 역사에서 더 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선이 풍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이 전통을 단지 보수적인 몽매와 관습으로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선이 삶에 대한 시험의 극복을 삶의 한복판에서가 아니라 그 주변에서 행하기 때문이다.”

                                                         

나치 수용소에서 죽은 신학자, 알프레드 델프. 「역사와 인간」 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혈연으로부터 달아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