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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Feb 06. 2019

미친 게 어디 아시안뿐일까.

영화 <CRAZY RICH ASIANS> 2018년

돈은 행동하는 신이다! 어느 고매한 분이 한 말이다. 돈에 몰입하는 삶은 천박하고 냉정하다 여기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돈이 사랑을 대신할 수 없고 그 어떤 생명의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지만, 아슬아슬한 사랑을 지탱해주고 위태로운 생명을 구하기도 한다. 적어도 돈이 부족해 생기는 빈곤과 자괴감, 수많은 막막함과 두려움을 막아주는 건 돈 그 자체다.



닉과 레이첼


레이첼 추(콘스탄스 우 Constance Wu)는 명민하고 긍정적인 뉴요커로 뉴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다. 뉴욕에서 싱가포르 태생인 남자 친구와 연애 중이다. 레이첼의 남자 친구 닉 영(헨리 골딩 Henry Golding)은 고향 싱가포르에서 하는 친구 결혼식에 레이첼과 동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커밍아웃한다. 자신이 싱가포르 제일의 거부 집안 장남이라는 것을.


똑똑한 여자는 남자 친구 집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재벌가라는 것에 아연실색한다. 돈으로 대변되는 기이한 권력과 위화감은 그녀를 직접적으로 압박하고, 당당한 자존감에 스크래치를 남긴다. 특히 닉의 어머니 엘레노어 영(양자경)은 노골적으로 레이첼을 배척한다. 물론 아들이 데려온 여자 얼굴에 물을 뿌리는 천박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녀는 막대한 부로 다져진 교양과 품위를 잃지 않는 선에서, 에두르지 않고 곧바로 내 아들에게서 떨어지라고 말한다. 세련되고 똑똑하지만 서민은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닉의 어머니 엘레노어를 만난 두 사람


레이첼이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아시아계 갑부들의 '그들만의 세상'은 화려하고 속물스럽게 속내를 드러낸다.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들만의 세상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행태는 거의 비슷하다. 명예나 자존감보다 돈으로 대체할 수 있는 권위와 파워를 마음껏 휘두르며 방종한다. 돈 자랑과 더 나아간 돈지랄은 그들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익숙한 일상이다. 금수저로 태어나 평생 써도 못 쓸 돈을 아낌없이 쓰는 건, 이상한 일도 비상식적인 일도 아니다. 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건, 자기들과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들어와 그들만의 세상을 뒤흔드는 것이다. 사랑은, 더 구체적으로 결혼은 외부자가 그들만의 편협한 세상에 진입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게이트다. 비슷하게 태어나 끼리끼리 놀고 성장해도 세상의 모든 틈을 막을 순 없다. 요즘처럼 막대한 부를 더 막대하게 일구기 위해서는 기업을 경영해야 하기 때문에, 글로벌 인재로 교육받는 그들은 오히려 마음껏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유연애를 할 개연성이 크다. (물론 그들은 상대와의 경제적 격차를 쉽게 극복하지 않으려는 강인한 의지를 갖고 있긴 하다.) 닉은 서민(치고는 평균 이상의 지위와 능력을 가진) 레이첼과 사랑에 빠지고, 그의 여자 형제 아스트리드는 서민 마이클과 결혼했다.


아스트리드 영과 그녀의 남편 마이클


레이철은 서민이다. 서민은 서민이란 이유로, 재벌가의 자제를 만나면 돈을 노리고 신분상승을 꿈꾸는 신데렐라라는 누명을 쓴다. 드물게 서민과 재벌이 결혼해도, 아스트리드 영의 남편 마이클처럼 열등감에 시달리며 자격지심에 절어 산다. 아스트리드가 명품을 쇼핑한 후 남편 눈에 안 띄게 숨기는 배려조차 마이클의 자괴감에 불을 지핀다. 아스트리드가 남편을 배려하는 방식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아내의 선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곡하는 마이클은 못난 남자다. 아마 그들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을 것이다. 돈과 상관없이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했을 것이다. 그러나 외도를 하고도 아내의 돈 때문이라 핑계 대는 마이클은, 돈을 펑펑 쓰며 개념 없이 사는 여느 재벌가 사람보다 더 한심해 보인다. 이처럼 돈이 부리는 기묘하고 불행한 마술은 능력 있는 멀쩡한 서민을 자괴감에 찌든 패배자로 만든다. 사실, 엘레노어도 젊은 시절 서민이란 이유로 시어머니에게 냉대를 받았다. 자신이 낯선 세상에 들어와 힘겹게 극복하고 다져온 장벽을 또 다른 서민이 진입하게 하고 싶지 않기에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내친다. 서민은 서민을 내치면서 그렇게 자신이 뼛속까지 서민이라는 콤플렉스를 드러낸다.


부자들의  '그들만의 세상'


부모 세대와 다른 점은 레이첼은 쿨하게 닉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돈 때문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돈 때문에 포기한다. 너의 돈보다 나의 자존감이 소중하기에, 그녀는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을 포기할 수 없어서 사랑을 내려놓는다. 그러면서도 사랑의 주도권은 놓지 않는다. 그녀가 달리 게임이론 전문가이겠는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여자는 기특해 보이지만, 그녀가 앞으로 맞닥뜨릴 시월드와 '그들만의 세상'은 (내가 친구라면) 말리고 싶다.


부자들 앞에서 자존감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레이첼


돈과 연관된 특이한 가족 권력 양상은 이 영화의 제목처럼 '미친 부자 아시안'의 문제가 아니라,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돈의 영향력 문제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시월드 문제도 그렇다. 아시안 특유의 가부장 문화 때문에 영 집안의 할머니 말에 다들 꼼짝 못 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할머니건 할아버지건, 나이와 상관없이 그 집안의 재력을 누가 쥐고 있는가, 막대한 부를 일구는데 누가 많이 기여했냐에 따라 권력이 재편되는 게 아닐까. 싱가포르 재벌 영 집안엔 닉의 할머니가 아직까지 부를 지배하는 수장을 맡고 있고, 그래서 그녀의 말에 다들 순종하는 (척하는) 것이지 아시안이기 때문에 연장자를 존중하는 문화로 보이진 않는다. 솔직히 돈의 영향력 아래 고분고분하는 것은 존경과 예우의 태도가 아니라 (돈을 쥔 사람에게) 내처 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예전엔 왕위나 집안의 작위로 자손들을 통제했다면, 이젠 이 모든 걸 돈이 하고 있다. 훨씬 더 강력하고 무서운 지배력으로.


닉의 할머니


뉴요커 레이첼이 시어머니가 무서워 결혼을 주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돈을 권력처럼 휘두르는 행태가 꼴같잖고 못마땅해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물러서는 제스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막말로 시월드는 평생 안 보고 살 수도 있다. 그에 따른 남편과의 갈등과 불편한 마음을 감수할 용기만 있다면. 레이첼이 맞닥뜨린 건 인종은 같지만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고, 그것은 아시안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문제다. 사랑보다 더 강하고 지배적인 돈의 영향력이 자신의 가치관을 변질시킬까 봐 그녀는 두려운 것이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재력가의 결혼식


레이첼은 경제학자로 게임이론 전문가다. 세상을 지배하는 돈의 속성과 지배 원리를 (이론적으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돈을 다루는 인간의 심리에 정통한 그녀가 삶에서 맞닥뜨린 지독한 게임에서 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녀와 남자 친구가 아시안이기 때문이 아니다. 상대는 유별난 시월드도, 재벌가도, 못돼 처먹은 졸부도 아닌, 세상을 떠도는 보편적 가치이자 개별적 권력을 휘두르며 행동하는 신, 돈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영원한 승자는 돈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의외로 신을 두려워하지 않을 방법은 간단하다. 돈 없이 살 수 있는 용기와 배짱만 있다면 말이다. 그게 요즘 세상에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믿고 따르는 신을 한 번쯤 진지하게 의심해 보는 것도 무의미하진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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