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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Feb 13. 2019

아이들은 인형으로 호두를 까지 않는다!

영화 <The Nutcracker and The Four Realms>

달달하고 반짝거리는 보석 같은 사탕을 100만 개 먹은 느낌?!! 영화 <호두까기 인형과 네 개의 왕국>을 보고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발레로만 알았던 '호두까기 인형'을 실사 영화로 접한 기분은 약간 얼얼하다. 일단 내 눈이 누린 호사는 역대급이다. 이 영화의 비주얼은 그 어떤 판타지 영화의 CG보다 나의 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사로잡을 만큼 판타스틱 그 자체다. 특히 발레가 삽입된 부분은 무대를 입체적으로 연출해서 독특했다. 호두까기 인형이 발레 작품의 고전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을 수 없게 만드는 세심한 의도라 생각된다. 괴물이나 히어로물의 CG만큼 웅장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깔끔하고 화사한 디즈니표 환상의 나라는 원작을 어떻게 바꿨는지와 상관없이 눈호강만으로도 내 취향을 저격했다.  




사탕의 나라 '슈가플럼'으로 분한 키이라 나이틀리


공주들의 변신은 무죄?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Keira Knightly)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이에겐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선별해 보여준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디즈니의 고전적인 여주인공들이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며 잠만 자는 수동적이고 맹한 캐릭터가 많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은 봐도 되고, 수동적이고 사랑에만 목매는 고전적인 여성이 나오는 영화는 지양해야 한다는 것은 어른들의 선입견에 의한 잣대가 아닐까. 자칫 아이에게 왜곡된 여성상을 심어줄까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먼 옛날이 배경인 가상의 세상에 사는 공주가 사랑에 목숨 좀 걸었다고 이렇게 심난하게 받아들이는 건 좀 오버 아닌가 싶다. 공주들도 나름 부모에게 반항하며 모험을 하고 어두운 현실을 타개하려 고군분투한다. 요즘 잣대로 보면 너무 (남자에게) 의존적이고 편협하긴 하지만.  


모험의 세계에 발을 디딘 클라라


난 아이들이 어른의 생각보다 훨씬 영특하고, 직관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안다고 본다. 인어 공주가 첫눈에 반한 왕자를 만나기 위해 벙어리가 되어 뭍으로 올라온다고 해서 주체성이 없는 한심한 여자라 생각하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백설 공주와 잠자는 숲 속의 미녀가 잠을 좀 많이 잔다고 게으른 게 아니듯, 그녀들이 왕자가 키스하지 않으면 눈도 못 뜨는 비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어린 여자아이는 은연중에 동화 속 공주와 자신을 동일시해서 판타지를 꿈꾸기도 하지만 그런 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애니메이션 영향을 받는다고 이것저것 선별하는 잣대 자체가 어른의 시각이고 관념이다. 늑대가 사람을 잡아먹는 동화를 접한다고 평생 늑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아이가 있을까. (물론 매우 드문 사례로 한 두 명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악당을 연기한 배우 엄마를 진짜 악인으로 여기지 않듯이, 아이들은 동화 속 괴물이나 악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할 정도의 지각과 (아무리 동화에 빠져 있어도) 현실과 동화 속 세상을 적절하게 나누어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있다고 본다. 오히려 고달픈 현실을 억지로 잊으려 파괴적인 약물에 중독되거나 술에 의지하는 건 어른들이다.     


호두까기 병정 호프만 대위와 함께 왕국에 도착한 클라라


진취적이고 호기심 많은 소녀 클라라(맥캔지 포이 Mackenzie Foy)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 침체되어 있는 가족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다. 특히 엄마 얘기를 입에 담지 못하게 하는 아빠와 부딪힌다. 크리스마스이브, 가족과 대부 드로셀마이어(모건 프리먼 Morgan Freeman)의 파티에 참석한 클라라는 엄마가 남긴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어줄 황금 열쇠를 찾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 황금실을 따라 마법 세상으로 들어간 클라라는 호프만 대위의 호위를 받으며 엄마 마리가 창조한 왕국에 도착한다. 엄마의 비밀과 환상적인 모험이 기다리는 세상에서 클라라는 왕국을 지배하려는 음모에 맞서 용감하게 싸운다.    


클라라를 지키고 보호하는 필립 호프만 대위


조심해라, 이건 명령이다!


주인공 클라라는 21세기에 재창조된 캐릭터답게 매우 진취적이고 명민한 소녀다. 그녀는 물리학을 운운하며 몸을 사리지 않고, 엄마에 이어 발명가를 꿈꾸는 소녀다. 그동안 무수히 비판받았던 수동적이고 전근대적인 디즈니표 공주님들을 뒤집어 버리고 탄생한 만큼 적극적이고 위험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 클라라가 자신의 엄마가 창조한 환상의 왕국을 거쳐가며 남자(호두까기 병정인 호프만 대위)의 호위를 받는 건, 연약한 여자로서 보호받는 게 아니라 공주의 신분으로 당당하게 군림하고 명령하는 입장을 취하게 한다. 병정에게 하는 '조심해라, 이건 명령이다!'라는 대사는 그녀의 캐릭터를 단박에 보여준다. 클라라뿐 아니라 슈가플럼(키이라 나이틀리 Keira Knightly)과 마더 진저(헬렌 미렌 Helen Mirren)처럼 이 판타지는 여성 캐릭터가 이끌어간다. 그렇다 해도, 이 영화가 매우 전위적인 여성상을 제시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엄마의 뒤를 이어 왕국의 프린세스가 된 클라라


클라라는 왕국의 여왕이었던 엄마의 뒤를 이어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공주라는 직위를 세습했다. 그녀의 모험심과 용맹은 칭찬할 만 하지만, 아무 노력 없이 이어받은 직위에 맞게 행동하고 대처한 것뿐이다. 인어공주와 백설공주보다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캐릭터일지는 모르지만, 받아들이는 아이들은 그 차이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진 않을 듯싶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예쁜데 정의롭기까지 한 겁 없는 소녀'는 물리학에 문외한이고 장래희망이 발명가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환상의 왕국에서 모험할 수 있다. 오히려 조금 소심한 여자 아이가 숨어 있는 용기를 끄집어내어 모험을 했더라면 더 다이내믹하지 않았을까 싶다.


클라라와 슈가플럼


클라라와는 조금 다르지만, 「겨울 왕국」의 안나나  「미녀와 야수」의 벨,  「인어공주」의 에리얼과  「모아나」의 모아나 역시 호기심 많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디즈니표 여주인공들이다. 시대에 맞게 여주인공 캐릭터가 다양하게 변신하고 능동적으로 사는 여성상을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모든 공주님들을 변신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엄마가 보지 못하게 통제해도 아이들은 머지않아 보고 싶은 영화를 어떤 식으로든 볼 것이다. 그리고 깨달을 것이다. 대체 엄만 왜 이걸 못 보게 한 거지? 내가 여섯 살 때 이걸 본들 무슨 일이 생긴다고...


클라라가 모험을 하는 네 개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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