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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pr 01. 2019

그렇다면 산 밑에 있었던 남자는 무슨 죄?

영화 <우리 사이의 거대한 산 The Mountain Between Us

  시련이 클수록 장애가 깊을수록 사랑은 운명적으로 다가온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본능과 감정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극지에 고립된 남녀가 생사를 오가는 와중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너무 절박한 당위라 오히려 감동이 반감된다. 그 상황에서 누가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외계인이 침략해 지구가 멸망해 세상에 남녀 딱 한 명씩만 생존했는데, 인류를 번성시키기 위해 둘이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단 하나뿐인 상대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내 목숨을 포함해 모든 걸 믿고 맡기는 것이다. 생존에 비하면 사랑은 너무 얄팍하고 안일하다. 사랑도 목숨이 붙어있어야 하는 것이니, 살려는 본능이 꿈틀대는 생명체라면 저절로 상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혼자 죽을래 아니면 나랑 사랑할래? 얼핏 들으면 매우 로맨틱하고 짜릿한 제안 같지만, 살면서 이런 선택지는 되도록 안 받는 게 좋지 않을까.  




  모든 성향이 확연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이 있다. 날씨 때문에 항공기가 결항된 어수선한 공항, 이성적인 남자 벤(이드리스 엘바 Idris Elba)과 감성적인 여자 알렉스(케이트 윈슬렛 Kate Winslet)가 마주친다. 신경외과 의사 벤은 볼티모어에 어린 소년의 뇌수술이 잡혀 있어 급히 가야 한다. 사진작가 알렉스 역시 결혼식을 앞두고 있어 당장 떠나야 한다. 발만 동동 구르던 알렉스는 벤에게 경비행기를 같이 타고 가자고 제안한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후, 두 사람 앞에 눈보라를 뒤집어쓴 거대한 산이 나타난다. 그때까지만 해도 알렉스와 벤은 저 거대한 산이 그들 사이에 버티고 있으면서 운명을 바꿀 것이라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경비행기를 타러 가는 벤과 알렉스


  악천후와 싸우며 위태롭게 비행하던 경비행기는 기장이 심장마비로 의식을 잃자 눈 덮인 깊은 산속에 추락한다. 벤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장은 죽었고, 알렉스는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살아남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함께 한다.


  논리적인 벤과 운명론자인 알렉스. 너무 다른 두 사람은 산속에 고립된 이 상황이 믿기 힘들지만 받아들인다. 비관하고 절망해봤자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처 입은 몸과 두려움 속에서도 살아 돌아갈 희망을 버리지 않지만, 곧 예기치 않게 부딪힌다. 벤은 부서진 비행기 안에서 구조대를 기다리자고 하는데, 알렉스는 앉아서 죽기만 기다릴 수 없다며 부상당한 다리로 길을 찾아 나선다.


"용기 없는 당신 때문에 이대로 죽기는 싫어요."


"나도 무모하고 이기적인 당신 때문에 죽기 싫어요."


  알렉스의 무모한 용기와 벤의 날렵한 이성은 시시때때로 충돌하지만, 둘은 상대 없인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더 이상 구조대를 기다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벤은 알렉스와 함께 길을 찾아 나선다. 벤이 빈 별장을 발견하는 동안, 알렉스는 얼음이 녹은 물에 빠진다. 벤은 목숨 걸고 그녀를 구조하지만 탈수증에 걸린 알렉스는 쉽게 깨어나지 않는다.


혼자서 길을 찾아 나서는 알렉스


  무모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목숨을 의지하며 생존의 순간을 조금씩 연장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어쩌면 당연하게 사랑을 나눈다. 알렉스는 자신을 걱정하며 기다릴 약혼자를 떠올리지만 당장 눈 앞에 있는 남자에게 흔들린다. 벤은 자신이 살리지 못한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지만, 죽다 살아난 알렉스에게 향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두 사람의 뜨겁고 절박한 사랑은 그토록 염원하던 구조가 되는 순간, 현실 속으로 곤두박질친다.


혼자 떠난 알렉스를 찾아 나서는 벤


  벤은 본다. 깨어난 알렉스의 병실에 함께 있는 남자, 그녀의 약혼자 마크(더모트 멀로니 Dermot Mulroney)를. 3주 동안 그녀와 단둘이 고립되어 있었던 눈 쌓인 산보다 더 거대한 산이 그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렉스 역시 깨닫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약혼자 마크에게 가기 위해 탄 비행기가 자신을 어디에 데려다 놓았는지. 그곳은 세상에서 마크에게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온 벤과 알렉스의 갈등과 재회는 그냥 운명이었다는 말로 밖에 설명이 안된다. 그들은 위험한 상황 속에 고립되어 생사를 함께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길지 않지만 아찔하고 강렬했던 시간은 인간을 바꿔놓기에 충분하다. 산속에 고립됐던 그들의 사랑과 운명이 이렇게 당위를 얻어가는 건 자연스럽지만, 산 밑에 있었던 알렉스의 약혼자 마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싶다. 그 역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 사람의 운명적 모험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마크는 애타는 시간을 보내고 간신히 만난 약혼녀를 떠나보내야만 한다. 그녀가 변했기 때문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못된 의도도 없이, 그냥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이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걸까. 약혼녀의 위기에 동참하지 못한 건 이 남자의 의지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크가 가장 억울한 것은, 자신에겐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선택의 여지없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크 입장에선 알렉스를 만나고 사랑하고 피를 말리며 구조되길 기다렸던 모든 시간이 허탈하지 않을까. 벤과 알렉스가 그들 사이에 있던 거대한 산을 정복하고 하산할 동안, 산 밑에서 기다린 마크는 갑자기 눈 앞에서 펼쳐진 거대한 광경에 망연자실할 것이다.


함께 길을 나서는 알렉스와 벤

 
  이 영화에서 가장 거대한 산을 맞닥뜨리는 사람은 마크다. 산에 오르지 않았으니 내려올 수도 없다. 속을 까맣게 태운 약혼자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는데, 허망하게 다른 남자에게 보내야 하는 그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걸까. 그냥 운명이려니 하기엔 너무 억울할 것 같다. 그는 몇 장면 나오지도 않고 거의 존재감 없이 사라졌는데, 그래서 더 신경 쓰인다. 살아 돌아온 남녀는 극적으로 결합해 위대한 사랑의 기억으로 남은 생을 살 테지만 조용히 사라져 준 남자는 무슨 기억으로 살까 싶다. 아마 새로운 사랑을 만날 테지만, 그 역시 고립되었던 악몽을 간직한 두 남녀 못지않게 산에 질리지 않았을까 싶다.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두 사람은 경비행기를 타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을까.


  살다 보면 거대한 산을 만날 수 있다. 내 눈앞에 버티고 있는 산에 굴복하지 않고 용기 내어 하산하는 게 중요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산 밑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또한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되도록 무모한 산행은 안 하는 것이 제일 좋지만, 만일 산에 갔는데 혹시라도 고립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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