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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pr 04. 2019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도 시인이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The Kindergarten Teacher>

*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에서 본 영화입니다.


  나는 '시알못'이다. 시를 알지 못하고 감히 써보겠다는 엄두도 내지 않는다. 가끔 시집을 읽고, 인상적인 시구를 만나면 어머~ 하고 감탄하며 서너 번 더 읽고, 그러다 드물게 시집을 사기도 한다. 시와 시인과 시집을 통째로 부러워하지만 질투하지 않는다. 이번 생엔 시를 쓸 수 없다고 인정하니 마음이 고요하다. 왜 나에겐 저런 문장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어째서 빈약한 상상력과 더 빈약한 능력밖에 없냐고 한탄하는 건 그나마 열망이 있을 때나 하는 짓이다. 불온한 열정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은 평화를 가장한 체념으로 그릇된 집착과 욕망의 씨를 말려버린다. 그나마 내 주제를 알기 때문이다.




삶이 공허한 중년 여성 리사


  리사는 유치원 교사로 일하며 무난한 남편과 사춘기 자녀들을 키우며 사는 평범한 중년 여성이다. 문학 강좌에서 시를 공부하고 있다. 예술적 욕망은 강하지만 재능이 따라주지 않는 그녀는 안정된 삶에 오히려 불안해하고, 눈빛은 늘 공허하다. 리사는 일상에 충실하지만 행복하지 않다. 그녀의 삶은 예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리사의 불행은 일상이 예술이 될 수 없음에도 예술적 욕망에 몸부림친다는 것이다.

  그녀의 기이한 열망에 화답한 사람은 유치원생 지미다. 그녀가 가르치는 아이 입에서 불시에 새어 나오는 시는 아름답고 찬란하다. 리사는 이 조그만 살아있는 예술품과 평범한 자신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환희에 찼다가 절망하길 반복한다. 지미의 시를 받아 적은 후, 자신의 시인 듯 문학수업 시간에 발표한다. 그녀는 단번에 존재감 없는 수강생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는 특별한 학생이 된다. 남의 창작품을 훔치는 뻔뻔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리사는 시 발표회에 지미를 데려가 모두의 감탄을 자아낸 시의 원작자가 누구인지 밝힌다. 물론 시 강좌 강사 사이먼의 비난과 실망도 한 몸에 받는다. 그 일로 지미는 유치원을 옮기고, 아이의 아름다운 시에 목말라하던 리사는 유치원에서 아이를 몰래 데리고 나와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


'천재 시인' 지미를 알아본 리사


  삶을 쉼 없이 사랑하는 사람은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의미 있는 삶을 지향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재능이 없어도 시인의 기질을 갖고 있다. 문제는 그 열정과 에너지를 써서 개인의 삶을 고양시키는 데 만족하면 되는데, 세상에 분출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다는 것이다. 어디에나 있는, 흔하디 흔한 평범함은 곧 진부함이다. 예술가에게 진부함은 죄악이다. 평범함은 동정을 유발하는 특이함이나 초라함보다 못하다. 남들 사는 만큼 평범하게 사는 게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에게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특이함을 찾아 헤매다 절망하며 인생을 낭비한다. 이보다 더 나쁜 건, 나는 못 가진 특출한 재능을 다른 이가 갖고 있는 걸 알아보는 밝은 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아이 지미


  맹목적으로 동경하고 나름 헌신한 예술이 삶이 되지 않다는 걸 안 여자는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밝은 눈은 천재 유치원생을 사랑하면서도 질투하게 하고, 동경하면서도 해서는 안될 짓까지 하게 한다. 비난과 공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중년 여자의 방황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 삶을 어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을 대변하는 듯하다. 열망했으나 이루지 못한 그 모든 것은 집착이 됐다 회한이 되고, 결국 체념의 쓰레기통에 분리수거된다. 누구나 그런 쓰레기통 하나쯤 갖고 있지 않나.


지미를 애정과 질투, 동경과 사심으로 대하는 리사


  열정이 있는 사람은 정상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사소한 비난의 여지조차 없이 사는 건, 평화롭고 무난한 일상을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독특한 삶의 비전이 되지 못한다. 리사가 꼬마 천재 지미를 대하고 사랑하는 방식은 문제가 좀 있다. 낮잠 자는 아이를 수시로 깨워 데리고 나가고, 시가 떠오르면 휴대전화로 불러달라고 은밀히(?) 지시하고, 부모 몰래 애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다. 확실히 성숙한 어른의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에게 세상을 다양한 눈높이에서, 진부하지 않게 보이려 애쓰는 모습은 진심 어린 애정이다. 자신에겐 없지만 아이에게 존재하는 천부적인 시심을 잃지 않게 하려는 것은, 그녀 또한 예술가이고 예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지미와 미술관에 간 리사


  시를 못쓰지만, 아니 평범한 시를 써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지만 그녀는 이미 시인이다. 시를 사랑하고, 아름다운 시를 알아보고, 그 시를 지키려 무모한 짓까지 하는 그녀가 시인이 아니면 대체 누가 시인일까. 리사는 독특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거나 아름다운 창작품으로 감탄을 자아내진 못하지만, 그녀만의 삶의 비전을 갖고 있다. 그 비전 때문에 삶이 공허해지고 절망하며 한숨을 쉴 망정, 그녀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지루한 인생과 예술을 합체하려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영향력이 제한적 일진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독특함과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내 기준에서는) 아티스트다.


시 발표회에 간 리사와 지미


  앞으로 별 일 없는 한 리사의 삶은 평범함과 진부함 그 사이 어디쯤에 머물겠지만, 그녀가 지미와 보낸 한때만은 그녀를 아티스트로, 그녀의 인생을 아트로 만든 반짝이는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시인에게 이보다 더 영롱한 선물이 또 있을까. 리사가 지미를 시인으로 끌어올렸다면, 이제는 지미가 리사를 시인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이미 리사는 어딘가에서 지미를 노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발 그녀가 그러길, 자신의 삶이 예술이 되는 불온하고 기이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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