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 길들이기 갈라콘서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019.05.19.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훈훈한 남자들이 떼로 나오는 무대를 보니 저절로 광대가 승천한다. 그들은 유쾌하고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말 그대로 미남(美男)들이다. 외모도 수려했지만, 오페라 아리아를 열창하는 음성과 무대 매너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캐주얼 오페라 『카사노바 길들이기』를 처음 본 건 작년 6월이다. 바람둥이 남자와 그의 연인, 그녀를 사모하는 또 다른 남자가 벌이는 해프닝에 여러 오페라의 유명한 아리아를 짜깁기해 넣은 경쾌한 작품이다. 《카사노바 길들이기 갈라 콘서트》는 그 작품에 나왔던 아리아 중 남성 성악가들(테너, 바리톤, 베이스) 노래로 구성한 콘서트다. 바리톤 김주택, 테너 김현수, 정필립, 베이스 손태진, 고우림, 한태인. 이 여섯 명의 성악가가 아이돌 못지않게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며 두 시간이 넘는 무대를 책임진 훈남들이다.
작년 오페라 공연 땐 볼 수 없었던 '코리아 쿱 오케스트라'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무대를 채우더니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서곡으로 포문을 열었다. 이어 나의 원픽, 테너 김현수 군이 등장해 도니제티 <사랑의 묘약> 중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가'를 열창했다. 정말 이 테너야말로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럽던지. 이번엔 턱수염을 장착하고 나왔다. 가까이서 보니 피부가 찹쌀떡처럼 뽀얗다. 지난 4월 철쭉 축제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봤는데 이렇게 보니 또 좋다.
그가 노래할 때는 가사 자막을 거의 보지 않았다. 가사를 보면서 들으면 현수 군이 왜 저렇게 폐부를 찌르는 듯한 표정으로 열창하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가사를 몰라도 그의 몸짓에서 다 느껴진다. 얼마나 애절하고 슬픈 내용인지. 혹은 얼마나 설레고 환희에 찬 노래인지.
운이 좋아 앞쪽에 앉아서 가수들 표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무대를 가까이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새삼 깨달았다. 현수 군은 나중에 '남몰래 흘리는 눈물'도 불렀는데, 진심 무덤에 계신 도니제티 선생님을 깨우고 싶을 정도로 열창했다. 이 노래를 현수 군이 아닌 다른 테너가 부르면 어쩌나 했는데, 내 바람대로 현수 군 음성으로 들어서 기뻤다. (그렇다고 다른 테너의 음성이 듣기 싫다는 말은 아니다.) 이제 이 노래만큼은 현수 군이 아닌 다른 테너의 음성은 상상이 안 된다.
베이스 손태진 군은 모차르트 <돈 조반니> 중 '그대 창가로 오라'를 들려줬다. 태진 군이 장미꽃을 들고 등장하는 순간 어찌나 반가운지, 그가 객석을 한 번 죽 둘러볼 때 눈이 마주치는(혹은 마주쳤다고 착각한) 순간 나도 모르게 활짝 웃고 말았다. 물론 현수 군이 등장할 때도 내 광대는 저절로 승천했지만, 그는 좀 긴장되어 보였다. 그래서 나도 덩달아 조금 긴장했다. 포르테 디 콰트로 콘서트가 아니라서 태진 군의 '아무 말'을 들을 수 없었지만, 노래만으로도 그는 변함없는 스위트하고 젠틀한 '리치 베이스 손태진'이었다.
바리톤 김주택의 무대는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것처럼 풍성하고 즐거웠다. 그는 베테랑 오페라 가수답게 아리아 한 곡으로도 매우 역동적인 무대를 선사한다.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는 낯익은 곡이라 그런지 더 흥겨웠다. 그가 1부 맨 마지막에 이 노래를 부를 때, 훈남들이 깜찍하게 일렬로 나와 무대를 채워줘서 재밌었다. 이런 건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직접 보는 수밖에.
베이스 한태인은 무대에서 노래하는 걸 처음 봤는데, 태진 군과 목소리가 비슷해서 살짝 놀랐다. 눈을 감고 들으면 누가 노래하는지 헛갈릴 정도다. 나만 그렇게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두 사람 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중저음으로 목소리 질감이 매우 흡사하다. 그러고 보니 큰 키도 그렇고 외모도 태진 군과 묘하게 닮았다. 아니, 닮았다기보다는 뭔가 분위기가 비슷하다. 얼굴보다는 목소리나 분위기가 흡사해 놀라웠다.
베이스 고우림의 무대도 인상적이었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목소린 가장 낮고 무게가 있다. 모차르트 <돈 조반니> 중 '카탈로그의 노래'는 바람둥이가 작정하고 부르는 곡 같은데, 소품까지 들고 나와 열심히 하는 걸 보니 흐뭇했다. 가사대로 한다면, 그가 들고 나온 책엔 여자들 이름이 빽빽이 적혀있어야 하는데, 노래하며 넘기는 책갈피가 깨끗해서 혼자 속으로 웃었다. 이왕이면 가사에 맞게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여자들 이름이 잔뜩 적혀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사실 그는 뺀질거리는 바람둥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순진한 소년 같았다. 그래도 뭐, 이 노래는 기가 막히게 잘 소화한 듯싶다.
테너 정필립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아리아 베르디 <리골레토> 중 '여자의 마음은'으로 무대를 휘어잡았다. 이 분은 푸근한 인상 못지않게 무대 매너도 힘차면서 깔끔하다. 내가 이번 생에 단 한 명이 아닌 두 명의 테너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직까진 한 명의 테너를 좋아하지만.
2부는 여섯 남자가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아리아를 선택해 들려줬다. 낯선 곡이 많았지만, 멋진 성악가들 덕분에 내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노래들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현수 군이 토스티의 'Ideale 이상'을 좋아했군. ㅎㅎ) 늘 현수 군 음성으로 듣던 'Non ti scordar di me 나를 잊지 말아요'를 태진 군과 한태인의 음성으로 들으니 신선했다. 게다 중간에 깜찍한 춤까지. 이런 달달하고 앙증맞은 몸짓, 정말 좋다.
비제 <진주 조개잡이> 중 '신성한 사원에서'는 이제 포디콰의 '빛의 사랑'으로 익숙하지만, 모처럼 현수 군과 태진 군이 부르는 원곡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들었다. 예전에 바리톤 김주택과 현수 군이 부른 동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다른 이중창을 들으니 새롭다.
훈훈한 고막 남친들을 보내기 싫어하는 관객들 아우성에 이들은 매우 역동적인 앙코르 무대를 보여줬다. 'O Sole Mio'와 'Funiculi-funicula' 그리고 멋진 남자들의 합창인 신나고 웃기고 귀엽고 재밌는 노래 'Wie die weiber man behandelt' 덕분에 눈호강 귀호강을 실컷 했다.
여섯 남자는 여섯 개의 수정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 하나 모자람 없이 모두 다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공연이 끝난 후 로비에서 하는 사인을 받고 싶었지만, 먼발치에서만 보고 차마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돌렸다. 사인을 받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게 잠깐 섬광처럼 보고 돌아서면 가슴에 총 맞은 것처럼 더 휑할 것 같아서다. (그를 보고 처음 하는 말이 ‘사인해주세요~’는 아니었으면 싶었다!)
열일한 그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밤에 푹 잤을 것이다. 난 이렇게 한번 보고 오면 쉽게 잠들지 못한다. 아름다운 무대를 되새기다 보면 혼자 이불 킥하며 웃기도 하고, 끝나버린 게 너무 아쉬워 한숨을 푹 쉬기도 한다. 나의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건 그들의 다음 무대 밖에 없다. 경우 없이 조바심치며 재촉하고 싶지 않지만, 그 무대를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