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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May 19. 2018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면

영화 <Phantom Thread> (2017)

그 여자는 시골 레스토랑의 순박한 웨이트리스다. 첫눈에 낯선 남자 손님과 눈웃음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들은 데이트를 한다. 남자는 여자보다 스무 살, 아니면 그보다 더 연장자다. 그는 깡마른 몸에 섬세하고 귀족적인 얼굴을 지닌 장인이다. 왕가와 상류층 여인들의 드레스를 만드는 예술가인 그에게, 그녀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맡긴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지만 불편해 보이는 드레스는 여자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한다.



예민한 남자의 눈 밖에 나자 여자는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독버섯을 먹어 무기력해진 남자를 그녀는 헌신적으로 돌본다. 건강을 회복한 남자는 그녀에게 청혼한다. 여자는 결혼한 후에도 외롭다. 남자는 이 결혼이 실수였음을 감지한다. 여자는 남자의 차가운 매너와 예민함에 반기를 들고 또다시 독버섯을 딴다. 남자는 아내가 만든 음식을 기꺼이 먹는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게 아닌, 아픈 만큼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는 이 가학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애정 행각을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사랑이 널 완성할 거야!


그녀의 사랑은 불안을 동반한다. 불안은 그녀를 주체적으로 표현하고 행동하게 한다. 치명적인 독은 그녀에겐 사랑의 묘약이다. 그에게 사랑은 저주나 다름없다. 뛰어난 미적 감각과 솜씨를 지녔고 여인들의 추앙을 받지만, 성마르고 예민한 남자 곁엔 여자가 붙어있지 못한다. 그는 어머니의 유령과 함께 사는 박제된 남자다. 유행을 극도로 혐오하며 자신만의 미적 세계를 고집한다. 그의 작업실은 정갈한 무덤이자 순백의 고립무원이다. 여자는 순수한 경박함과 불안을 달고 살지만 당당하고 솔직하다. 누가 이 관계를 휘두르는 지배자이고 사랑의 승리자인가. 얼핏 보면 남자에게 주도권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묘약을 쓸 줄 아는 그녀가 방향키를 잡고 있다.



저주받지 않았다!


그는 부와 명성과 능력을 가졌지만 삶이 없다. 평범한 일상이 주는 즐거움과 안식을 모른다. 열여섯 살에, 두 번째 결혼하는 엄마의 웨딩드레스를 직접 만든 소년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옷을 지었을까. 드레스의 저주는 평생 남자의 삶을 지배한다. 여자는 완벽해 보이는 남자의 불완전한 본성을 한눈에 간파한다. 그가  옷깃에 숨겨놓은 '저주받지 않았다'가 쓰인 쪽지를 몰래 제거한다. (실제로 디자이너 알렉산터 맥퀸은 고객이 입을 옷 솔기 속에 쪽지를 넣었다고 한다) 여자의 불안한 영혼은 그처럼 보이지 않은 실이 되어 귀신같은 솜씨(Phantom Thread)로 남자를 서서히 잠식한다.




모든 영화는 사랑 이야기


모든 영화는 사랑의 서사다. 누군가 영화에 내린 가장 단순하고 진실에 가까운 정의다. 코미디든 스릴러든 액션물이든, 장르만 다를 뿐 결국 하는 이야기의 본질은 사랑이다. 영화를 보는 행위는, '이번에 나오는 사랑은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불안이 그려내는 이 서늘한 사랑은 누구의 솜씨일까. 감독일까 배우일까 디자이너일까. 의미 없는 질문이다. 그들 모두 힘을 합쳐 이 섬세하고 우아한 작품에 매진한 결과일 것이다. 굳이 조력자를 더 꼽자면, Phantom이 아닐까 싶다. 타이틀에 들어간 이 존재야말로 인간들의 삶과 사랑이 어디까지 기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은유다.


이 작품을 끝으로 은퇴한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환갑 나이에 이렇게 매력적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 분이야 말로 진정 살아있는 유령이다. 그가 은퇴를 번복한다면 맹세할 수 있다. 그의 전작과 앞으로 나올 작품을 모두 보겠다고. 봤던 것도 또 볼 것이라고. 그가 원한다면 두 번씩이라도 보겠다고. 그가 연기하는 행위는 메소드나 교과서적이라는 수식어를 진부하게 만든다. 그는 귀신같은 솜씨를 지닌 이 시대의 진정한 마에스트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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