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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23. 2018

정말 아무도 몰랐을까?

영화 <아무도 모른다> (2004)

  개명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가장 1차적인 아이디인 성명을 교체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주민등록증과 여권, 휴대폰과 은행 계좌의 명의를 비롯해 회원 가입한 각종 협회와 사이트에서 내 이름을 일일이 바꿔야 한다. 내가 '이름'을 밝히고 가입한 곳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다. 몇 개월 혹은 몇 년만에 튀어나오는 옛 이름이 통용되는 단체는 당혹스럽기까지 한다. '이름'은 나라는 인간이 개별적 주체로 존재한다는 증거이자 하나의 상징이지만, 그저 가족이나 아는 사람 몇몇이 불러준다고 해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으로 식별되는 나란 존재가 이 사회의 구성원이자 개체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의 기관에 등록되고 소속되어야 한다. 존재 자체만으로는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




  엄마는 크리스마스에 돌아오겠다 하고 집을 나갔다. 열두 살부터 다섯 살까지, 네 아이는 엄마를 기다리며 좁은 아파트에 갇혀 산다. 출생신고도 되어있지 않은 아이들은 학교도 안 다니고 세상 어느 곳에도 등록되거나 소속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숨어 살 망정, 살아 숨 쉬며 활기차게 웃고 떠들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이다. 하지만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이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체는 있지만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기록이 없다는 건 존재를 증명할 근거가 없고, 기본적인 사회 복지나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뜻이다.


엄마와 네 명의 아이들


  이 아이들이 무책임한 부모의 방관과 무지 때문에 불우한 환경에서 사는 것은 개인적인 불행이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서도 존재를 증명하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건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구조적 불행이다. 구조적 불행의 1차 원인도 물론 부모에게 있다. 낳은 아이를 출생신고조차 안 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로 만든 건, 무지와 방관 정도가 아닌 범죄고 학대며 잠재적 살인이다. 무책임한 엄마의 방치는 아이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가장 어리고 약한 아이부터 희생당한다.


엄마없이 사는 아이들

  네 명의 아이들이 어른 없는 집에서 수도와 전기가 끊긴 채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는데도 주위에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아마 눈치는 챘겠지만 나서서 도와줄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밀린 가스비와 수도세, 전기세를 받아내기 위해 여러 번 고지서를 발송하고 직원을 보내 독촉하는 기관은 제 할 일을 할 망정,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을 수상히 여기거나 어떤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건 그 기관의 업무가 아니고 문서에 명시되어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월세를 받으러 온 이웃도, 유통기한이 지난 편의점 음식을 챙겨주는 직원도 아이들의 열악한 사정을 빤히 보지만,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며 넘겨버린다. 공원에서 몸을 씻고 빨래를 하는 아이들을 볼 수밖에 없는 이웃들은, 그저 피하고 싶은 가난하고 성가신 동네 애들에게 신경 쓰지 않기로 작정했을 것이다. 무신경한 이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는 편의점 알바에게, 첫째 아키라는 엄마가 좀 늦어질 뿐이라며 형제들과 헤어지지 않으려면 복지 시설의 도움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일축한다.


동생들을 돌보는 첫째 아키라


  아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기댈 수 없는 엄마라는 존재를 잊은 채 자기들끼리 살아간다. 하지만 돈벌이를 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무엇으로 생존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 최소한의 생존 여건을 마련해주고, 자립을 도와줄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 역시 사회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체는 있지만 세상에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아이들은 이웃이 빽빽한 주택 단지에서 고립되어 죽어간다.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유명하다. (1988년 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모티브로 했다.) 영화도 끔찍하지만 실화가 더 끔찍하다. 죽은 막내 동생을 트렁크에 담아 하네다 공항 근처에 묻고 오는 첫째는 실제로 엄마가 둘째가 죽자 벽장에 처박아 놓는 것을 보고 그랬다고 한다. (영화에선 막내만 죽는다) 사실 영화 속 아이들은 비참한 상황에 비해,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참 밝고 사랑스럽다. 돈이 떨어져 유통기한이 지난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공원에서 머리를 감고 빨래를 할 망정 아이들 특유의 웃음과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는다. 하수구에 (자기들과 닮은) 버려진 꽃을 보며 예쁘다고 하고, 컵라면 용기에 씨앗을 심어 식물을 키운다. 막내는 좋아하는 초콜릿 과자를 소중히 아껴 먹으며 엄마를 기다린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이런 애들을 버리고 남자와 가버린 애들 엄마를 저주하게 된다.


  이렇게 생생하고 천진난만하게 존재감을 뿜어내는 아이들이 이 세상 어떤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아이들이었다는 게 가슴이 미어진다. 출생신고만 되어 있었더라도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방치되진 않았을 거란 현실적인 생각과 자괴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죽어도 사망신고조차 할 필요 없는 아이, 트렁크에 담겨 큰 오빠가 묻어주는 곳에서 잠든 아이는 이 세상에 왜 왔다간 것일까. 부모의 무지 때문이라고는 해도 너무 큰 대가를 치른 아이들의 모습은 할 말을 잃게 한다. 살아 숨 쉬고 뛰어다니며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생생한 존재감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세상은 기록에 없는 이 아이들을 정말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몰라도 된다고 여겼던 것일까. 행정처분 대상이 아닌 존재는 보호할 의무가 없고 방치해도 책임질 일이 없다는 생각이 살아있는 사람을 유령으로 만든 건 아닐까. 그런 것이 아니라면, 미개하고 가난한 나라가 아닌 일본에서 왜 이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복지의 사각지대를 얘기하자면,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새삼, 실체보다 기록과 소속으로 증명을 존재하는 게 필연적인 사회에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몸서리치게 자각된다. 존재하는 나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태어났다는 기록과 어딘가에 소속되어야만 내가 온전히 증명될 수 있는 사회는, 반대로 내가 없어져도 내 기록이 지워지고 소멸이 증명되지 않는 한 또다른 유령으로 내가 떠돌 수 있을 것이다. 왠지 좀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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