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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29. 2018

남몰래 흐르는 미소

오페라 콜라주 <카사노바 길들이기> (2018. 6. 28)

지극히 사심어린 애정


  나의 매력적인 테너 김현수가 이끄는 대로, 그의 오페라 무대에 자석처럼 끌려갔다. 단독 콘서트 'Sogno' 이후 무대에서 못 본 지 오래돼서 많이 보고 싶었고 기다리던 공연이었다.




  오페라 콜라주 <카사노바 길들이기>는 기존 오페라에서 한국인의 귀에 익은 유명 아리아와 듀엣곡 등을 골라, 새롭게 엮은 이야기에 첨부한 캐주얼한 오페라 공연이다. 노래는 원어로 부르지만 연극 형식의 대사는 우리말로 한다.


  사실, 노래가 나올 때 가사 자막이 뜨는 프롬프터는 거의 보지 않았다. 그거 볼 틈이 어딨나, 나의 테너를 비롯해 무대 위 성악가들의 숨소리라도 놓칠까 두려웠는데. 가사를 몰라도 분위기와 감정과 흐름에 몸을 맡기면 이 극을 즐기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미니멀한 무대에 특수 효과를 더해 깊이 있는 공간과 배경을 연출한 솜씨는 감탄스러웠다. 성악가들의 위트있는 연기와 노래 또한 완벽했고 환상적인 감동 그 자체였다. 다만, 억지로 해피엔딩으로 봉합해 버린 듯한 줄거리는 살짝 엉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대라는 특성상 많은 생략과 극단적인 비약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사람을 죽이고 유기한 카사노바를 너무 쉽게 용서해주고 사랑하는 거 아닌가 싶다. 그도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다 살아났으니 죄값을 치렀다고 보는 건가?

  그리고 이 극의 배경을 자세히 보면 외국과 한국, 현대와 과거가 묘하게 혼재되어 있다. 남자 주인공들 이름은 '준'과 '지민'으로 순 한국 이름인데 반해 여주인공들은 '안나'와 '수지'로 외국 정서가 강하다.(물론 이 이름들도 한국에서 통용되긴 한다)

  배경은 더 헛갈린다. 분명 요즘 한국이 배경인데 대사에서 느껴지는 정서나 여주인공들의 의상은 묘하게 유럽의 클래식한 분위기다. 고전적인 오페라 곡과 현대적인 배경의 이질감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차라리 배경을 노래의 톤에 맞춰 유럽의 과거 어느 시대로 했으면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거슬리는 부분이긴 한데, 오페라의 대중화를 시도한 이 참신한 기획이 오래 살아남으려면 의문의 여지 없는 탄탄한 구성과, 배경이나 상황을 단순하지만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같은 이름 모를 관객에게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도록 말이다.


아름다운 테너 김현수


  고백하자면 현수 군에 대한 지극한 사심이 아니었다면 이 공연을 그토록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순수하고 어리바리한 캐릭터로 나오는 그는 포디콰 공연에서 노래 사이사이 아무 말을 투척하며 미소 짓게 만들던 '귀염둥이 얼굴의 신' 그 자체였다. ('얼굴의 신'답게 턱수염을 장착해도 그의 얼굴은 쉬지 않고 열일한다) 다른 성격의 무대에, 다른 이들과 함께, 다른 캐릭터로 있어도, 콘서트나 방송에서 본 자연인 김현수의 모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 좋았다. 어떤 배역이라도 성실하게 잘 소화해냈겠지만, 그가 연기한 순수하고 어수룩한 남자는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안쓰러우면서도 보는 이를 웃게 한다.


'귀염둥이 얼굴의 신'


  그가 이룰 수 없는 짝사랑과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으로 괴로워하며  '남몰래 흐르는 눈물(Una Furtiva Lagrima)'을 부를 땐,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다행히 웃지 않았다) 술병을 들고 밤거리를 쏘다니며 애간장을 녹일 것처럼 부르는 그를 보면 절대 웃어서는 안 되는 곡이다. 그래도 나는 내내 흐르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이 노래는 내게 '테너 김현수의 시그니처 아리아’로 각인됐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콘서트에서, 각종 동영상과 그의 음반에서 족히 300번 이상 보고 들었다. 내가 300번 넘게 들은 이 노래를 그는 아마 3천 번 이상 부르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도니제티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은 김현수의 눈물 이외에는 그 누구의 눈물로도 상상할 수 없다. 세상의 그 어떤 날고 기는 테너가 불러도 내게 이 노래는 그냥 김현수의 노래다. 이 노래 전주만 나와도 자연 반사적으로 그의 포근하면서도 페부를 찌르는 웅장한 음성이 환성처럼 들릴 것 같다. 도니제티를 무덤에서 깨워 말해주고 싶을 정도다. 한국의 테너 김현수가 부르는 선생님의 노래를 들어보라고. (물론 현수 군의 성대와 입을 거쳐간 다른 수많은 아리아와 가곡들의 작곡가들에게도 한 마디씩 해주고 싶긴 하다. 저 재능 있고 아름다운 테너가 당신들의 노래를 빛나게 하고 있다고. ㅎㅎ) 그래서 애타게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르는 현수 군을 보면서 나는 '남몰래 흐르는 사심 가득한 미소'를 감추느라 힘들었다. 그가 무대 어느 한 구석에 대사 없이 서있기만 해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른 분들의 연기나 카리스마가 미치지 못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애초에 한 사람을 보기 위해 사심 가득한 마음으로 찾아서 그런 것뿐이다.


바리톤 조병익


  사실 다른 분들의 연기와 노래는 놀라운 감동과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주인공 바리톤 조병익 님의 바람둥이 연기와 노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바람둥이 치고는 순하고 푸근한 이미지였지만, 극에 몰입하는 덴 문제 없었다. 아름다운 두 소프라노 김신혜 님과 박하나 님의 우아하고 격정적인 아리아와 듀엣은 내가 몰랐던 또 다른 환상을 맛보게 해주었다. 극의 곳곳에서 역동적인 춤과 연기를 보여준 무용단원들 역시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우리 태진 군. 포디콰의 팬이라 그런지 왠지 남 같지 않은 베이스 손태진의 재기 발랄하고 위트 있는 연기에 쉴 새 없이 웃음이 나왔다. 너무 이것저것 하느라 힘들다고 투정하는 애드리브(인지 대사인지는 모르겠지만)를 비롯해, 능청스러운 모습은 너무 귀여웠다. 현수 군과 둘이 급하게 짠 것 같은 깨알 같은 애드리브(축구 경기 보느라 어젯밤 못 잤다는 대사)에선 빵 터졌다. 이런 깨방정 '비즈니스 브라더스'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멋있고 점잖은 와중에 '아무 말' 토크를 선보이는 포르테 디 콰트로의 다음 콘서트까지 어떻게 참을지 모르겠다.


베이스 손태진


  커튼콜도 없이 얄짤없게 끝난 무대가 너무 아쉬워서 한동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뮤지컬에선 커튼콜 때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오페라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폰을 꺼두었는데, 마지막 무대 인사 때 미처 사진 한 장 못 찍은 게 내내 마음이 아프다. 다른 사람들이 잽싸게 폰을 꺼내 찍는 걸 보니 괜히 꺼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자리라 줌으로 안 당겨도 현수 군과 태진 군 얼굴이 선명하게 나올 위치였는데.


  그들이 잡아당기는 인력에 끌리는 이 사심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카사노바와 더불어 관객까지 길들이는 이 매력 부자들에게 또 한 번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어제 팔이 아프도록 많이 쳤지만, 그 어떤 박수와 함성도 이들에겐 충분하지 않다. 나에게 기어이 오페라 티켓까지 예매하게 만드는 어메이징한 남자 김현수. 그가 이런 캐주얼 오페라가 아닌 이탈리어를 주구장창 하는 오페라 공연을 한다 해도 당연히 난 또 자석처럼 끌려갈 것이다. 못알아들으면 어떤가. ‘얼굴의 신’을 보는데 언어의 장벽은 문제되지 않는다. 물론 얼굴 하나로 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의 총체적인 매력을 알아버린 이상, 어떤 무대라도 거부하기는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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