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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05. 2018

바람 공화국의 어른이들

영화  <바람 바람 바람> (2018)

'바람'의 나라 대한민국


'바람의 나라'가 ‘불륜공화국’보다 어감이 낫지 않을까 싶다. 더 유하게 느껴지고 덜 추접하게 보이니까.


대한민국 3,40대 고만고만한 남녀 친인척 네 명이 깡그리 바람을 피운다. 원래 내추럴 본 바람둥이인 석근, 남편을 사랑하지만 외로운 여자 담덕, 늦게 배운 도둑 봉수, 깍쟁이 같은 헛똑똑이 미영. 외도를 안 하면 신체 특정 부위가 썩거나 곰팡이가 피나 싶을 정도로, 이 표본 집단의 불륜 지수는 100%다.

코미디와 불륜이 의외로 궁합이 잘 맞는다는 건, 무작위로 영화 100편을 골라봐도 알 수 있다. 한없이 가볍고 경쾌하지만 뒷맛은 석연치 않은 불륜 코미디가 세상에 나온 건, 불륜 커플이 하나 더 탄생한 것보다는 세상에 해롭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찝찝하다, 이 영화.


외도 전문가 석근


전형적인 시대착오적 불륜녀


제니(이엘)는 이 영화의 중심이다. 비중이 그렇다기보다는 그녀의 위치가 그렇다. 원래 석근(이성민)의 상대였다가 그의 매제 봉수(신하균)로 갈아탄다. 그리고 그의 레스토랑에 취직하며 봉수의 아내 미영(송지효)에게 접근하며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러다 뒤에 홀아비가 된 석근과 잘 될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처음 당구장에서부터 팬티를 벗어 머리에 묶는 해괴망측한 짓을 하며 도발(을 의도했겠지만, 그냥 짜증 나고 미친 짓으로만 보이는)하더니, 상큼하게 타깃을 바꾼다.


전형적인 불륜녀 제니


이 여자의 당당함과 거리낌 없는 행동은 얼핏 멋지고 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어디서 많이 봤던 전형적인 머리 빈 불륜녀일 뿐이다. ‘나 불륜녀에요~’라는 라벨을 온 몸에 새기고 다니는 듯한, 딱 그런 이미지다. 이 영화 제작진이 전형적인 남성의 선입견을 잣대로 안일하게 불륜녀 캐릭터를 구축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제니는 육체적 매력이 시들면 사그라질 시한부 같은 무기를 지니고 되는 대로 사는 여자다. 남의 남편을 빼앗겠다는 의지조차 없으면서, 따분한 인생의 활력으로 불륜남 가정에 파고들어 스릴을 즐기는 불쌍한 인생이다. 유부남에게 매달리며 진짜 사랑했다고 신파를 찍는 여자보다 덜 추할지 모르지만,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쿨한 척했지만 결국 남자에게 '날 사랑하긴 했냐'라고 물어보는 건, 척만 했지 진짜 쿨하지도 못하단 증거다.   

남자들 눈엔 그녀의 똘기 충만한 짓(그것도 나름 매력이라 치면)이 치명적인 유혹이고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당당한 매력이라면 여자들에게 그녀처럼 살고 싶은지 물어보라. 아마 대부분 미쳤냐고 할 것이다. 이왕 불륜녀를 봐야 한다면 하는 행동이 빤히 예상되는 얄팍한 여자가 아니라, 21세기에 맞게 더 지능적이거나, 더 치명적이거나, 더 색다른 여자를 보고 싶다. 20세기에 나온 프랑스 영화 <내겐 너무 예쁜 당신>의 뚱뚱하고 평범한 여자보다 더 개성 없는 불륜녀는 이제 지겹다.  


신참 바람둥이 봉수와 전문적인 바람둥이 석근


한없이 가벼운


이 영화의 경쾌한 리듬은 대사에 기인하다. 탁구공처럼 톡톡 튀며 오가는 대사의 감칠맛을 미덕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은 모양인데, 난 반대로 대사 때문에 신경이 거슬렸다. 거의 모든 인물이 빈번하게 대사를 카피처럼 튀게 구사하고 비약하는 버릇은, 이 영화의 비현실성을 도드라지게 한다. 물론 코믹하고 실소를 자아내는 대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부간에, 매제와 처형 간에, 불륜녀와 상간남 간에 시종일관 카피만 읊어대는 느낌은 이 영화를 한없이 가볍게 한다.

코미디가 가벼운 게 죄가 되진 않는다. 이 가벼움이 영화의 전체적인 톤을 결정하고, 그러면서 소재이자 콘셉트인 불륜마저 한없이 가볍고 안일하게 비약시킨다는 게 문제다. 이 불륜남녀들의 행태는, 외도가 기나긴 결혼생활을 유지시켜주는 윤활제이자 꼭 필요한 액세서리처럼 보이게 한다. 권태기 부부의 해피엔딩과 바람둥이의 개과천선을 위해 외도를 가져다 적극적으로 활용한 느낌이랄까.


봉수의 아내 미영


봉수가 아내를 지척에 두고 제니와 동침하며 벌이는 슬랩스틱이나, 마지막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내에게 외도가 폭로되는 걸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던져 사태를 봉합하는 건 이 영화가 지향하는 태도를 은연중에 보여준다. 몸으로 저지른 일은 몸으로 막으면 되는 건가. 매제와 여동생의 바람으로 예상되는 파장은, 언제나 그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 석근이 나서서 해결하고 봉합한다. 몸에는 몸, 바람에는 바람으로 해결하는 이 일차원적인 방정식은 코미디니까 그냥 넘어간다 쳐도, 넷이 함께 평온하게 식사하는 마지막 씬은 정말 상을 들러엎고 싶을 정도로 파렴치하다. 참고로, 난 외도에 민감한 유부녀도 아니고 바람 때문에 피해보거나 상처 입은 트라우마도 없다. 평화로운 마지막 씬에 비위가 상한 건, '쟤들은 진심 저러고 싶을까?'하는 원초적 감정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데, 그들의 삶은 어째 시종일관 희극뿐이다. 담덕의 죽음조차 이 영화가 페이소스를 주는 데 기여하진 못했다. 코미디라고 늘 가볍게 웃겨야 하는 건 아니다. 마지막 씬은 너무 가깝게 찍었다. 좀 더 줌 아웃해서 점처럼 작게 피사체를 보여줬다면, 비극이 될 당위성이 많은 그들의 인생을 희극이라 봐줄 수 있었을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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