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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03. 2018

아홉 살짜리 남편이라니

영화 <Birth> (2004)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죽음은 지극한 사랑을 불가피하게 갈라놓는다. 진심을 다한 사랑은 죽음 또한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많은 이들은 믿고 싶어 한다. 과연 그럴까. 변치 않은 사랑을 완성시키는 건 죽음이 아니라 착각과 오해일지도 모른다.  




  애나는 10년 전 남편을 잃은 젊고 아름다운 커리어우먼이다. 연인 조셉과의 재혼을 앞둔 어느 날, 그녀 앞에 나타난 아홉 살짜리 남자아이는 애나에게 다짜고짜 그 남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한다. 자신이 애나의 죽은 남편 션이라면서. 좀 더 개연성 있게 설명하자면, 애나의 남편이 이름이 같은 자신으로 환생한 것이라 주장한다. 소년은 애나의 기억에 남아있는 부부 사이의 추억을 말하며 묘한 분위기로 그녀를 자극한다. 물론 애나는 아이의 주장을 믿지 않으려 애쓰며 부인하지만, 점점 흔들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납득할 순 없지만, 어쩌면 이 아이가 정말 남편이 환생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란스럽다.


애나의 전 남편이라 주장하는 션


  그녀는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은 남편에 대한 미련과 회한은, 환생을 주장하는 이 아이의 등장으로 폭발하듯 끓어오른다.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린 소년에게 남편의 흔적을 찾으며 마음을 빼앗긴다. 애나의 약혼자 조셉은 갑자기 나타난 이 조그맣고 기이한 훼방꾼에게 맹렬한 적의를 드러낸다. 애나가 어린 소년에게 여자로서 흔들리는 걸 보는 심정은 참담하고 끔찍하다. 그들의 결혼식 날, 조셉은 션을 보자 참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조셉과 파혼한 애나는 심사숙고 끝에, 소년에게 11년 후 성인이 될 때까지 도망가서 둘이 살자고 제안한다. 이제 그녀는 이 아이가 남편의 환생이라 믿는다. 아니 믿고 싶은 마음에 굴복한다. 션은 어렵게 마음을 내보인 애나에게 자신은 그녀의 남편이 환생한 아이가 아니며, 장난이었다고 고백한다. 소년은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것이고, 무엇이 이 장난을 끝내게 한 것일까.


조셉과 애나


  션을 고백하게 만든 장본인은 애나 부부의 오랜 친구 클라라다. 그녀는 소년을 보자마자 환생은 헛소리고 그가 가짜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다. 환생 놀이하는 이 진지한 꼬마에게 '너는 날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엄포를 놓으며, 자신이 죽은 션의 애인이었다고 말한다. 세상이 모르는 관계, 불륜녀 딱지를 달 기회조차 없이 애인을 보낸 여자는, 남편을 못 잊는 또 다른 여자를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는 당신이 아니라 나였다고 밝히고 싶었을 것이다. 환생 운운하며 죽은 남자에 대한 사랑마저 독점하는 애나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이다.


  죽기 전, 션은 클라라에게 사랑의 증표로, 아내에게 받은 러브레터를 뜯지도 않고 고스란히 줬다. 사랑하지 않은 아내에게 받은 볼 필요도 없는 편지들. 클라라는 간직하고 있던 그 편지들로 애나를 괴롭히려다 마음을 바꿔 땅에 파묻는다. 어린 션이 그 편지들을 발견했고, 환생 놀이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진실을 알지 못하는 애나


  애나는 조셉과 다시 결혼하지만, 이미 흔들린 마음을 추스리기 쉽지 않다. 그녀는 끝내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죽은 사람이 (의도하지 않게) 벌인 사기극의 희생자이자 수혜자가 되어 흐느낀다. 좀 괴로울 망정, 애나가 평생 착각과 오해 속에 전 남편에 대한 사랑을 완성품으로 간직하며 사는 게 나은 건가. 아니면 남편의 추악한 과거를 알고 정신 차리는 게 나은 건가. 자신과 결혼한 남자에게 종종 러브레터를 쓸 만큼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 그녀에게, 진실은 너무 잔인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오해와 착각은 사랑을 완성시키는 변치 않는 다이아몬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가 생전에 시작한 배신이 한 여자의 사랑을 완전하게 하는 이 아이러니한 사기극은 아슬아슬하면서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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