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이스 Apr 27. 2018

파리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

책 <배를 놓치고, 기차에서 내리다> 이화열 에세이 (2013)

  세월호 참사 4주기가 되는 날, 검푸른 표지가 바닷속처럼 아득해 보여 잠깐 망설이다 책을 들었다. <배를 놓치고, 기차에서 내리다> 깔끔하고 가독성 높은 문장은 술술 넘어갔다. 그러다 문득, 이 책은 이렇게 읽을 책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아주 천천히 읽었다.


  이 책은 파리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여인이 쓴 에세이다. 그녀는 파리지앵과 결혼해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아들 딸을 낳고 파리 시민으로 열심히 쿨하게 사는 일상을 파리보다 더 아름답고 수려하게 써놨다. 그녀가 사는(지금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은 2013년도에 나온 것이라) 앙리 지누가의 아파트와 골목길, 노상 카페와 다국적 이웃들과 붙박이 노숙자에게선, 내 촌스런 고정관념으로 표현하자면 파리스러운 향수 냄새와 쿨 내가 동시에 진동한다.


  아랍인 이발사와 할머니 거리 댄서를 보는 작가의 시선은 엄정하면서도 따뜻하다. 같은 아파트 건물에 사는 이웃들과 파티에서 만나는 지인들에 대한 묘사는, 관심과 배려가 황금비로 내재된 작가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친하다고 속속들이 알려하지 않고, 아는 것도 경박하게 떠벌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글을 보면, 그녀의 시어머니와 이웃에 사는 치과의사를 보고 싶어 진다.


  예전에 파리 생활을 묘사한 에세이 두 권을 읽은 적이 있다. 불문학을 전공한 소설가는 일 년 중 한 달은, 고향을 찾듯 파리 뒷골목으로 스며들어 살다 나온다. 그녀의 파리 생활기는 지독한 상념과 묘사로 빽빽했다. 그 책을 보고, 라데팡스라는 지명도 알게 되었다. 다른 한 책은 굉장히 전위적인 제목을 가졌는데, 진보 성향이 강한 여성이 파리로 유학 가서 만난, 스무 살 연상의 남자와 비혼으로 아이 낳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두 책 다, 읽고 난 후 파리에서 몇 달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사그라들긴 했지만. 살아본 사람이 말하는 파리는 쿨하고 감각적이지만,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물가는 비싸며 의외로 더러운 도시다. 그래도 안 가본 나로서는 죽기 전엔 꼭 가서, 그 비싸고 더러운 개인주의를 피부로 체험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이 책은, 파리에 대한 동경을 전혀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작가의 화법은 따라 하고 싶을 정도로 정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동양인으로, 혹은 이방인으로 낯선 도시에 정착한 사람이 흔히 갖는 감상도 별로 없다. 그녀는, 약력과 이름을 가리고 글만 보면 프랑스 태생의 파리 시민이다. 한국의 지인과 가족에 대한 회상이 간간이 보이지만, 그것만 골라내면 영락없는, 감각적이지만 쿨한 개인주의자인 파리지앵이다. 그녀의 남편은 심장 수술을 앞두고 혹시 몰라 신변 정리를 한다. 그걸 지켜보는 아내는 그저 담담하다. 그 부분을 읽으며 프랑스인은 진짜 쿨하구나, 하며 나까지 괜히 쿨해졌다. 그녀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지인의 불행한 과거사엔 신파가 낄 여지가 없다.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니, 할 정도로 내 마음과 취향을 사로잡은 이 책을 읽고, 왜 파리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고 드디어 알아냈다. 아니, 내 마음을 눈치챘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진짜 파리는, 이 책의 작가가 묘사한 파리보다 훨씬 못할 거란 직감 때문이다. 내가 가건 안 가건 파리는 늘 거기 그렇게 있겠지만, 이 책에 그려진 파리는 아마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녀의 고즈넉한 심성과 맑은 글솜씨로 필터링한 거리와 이웃들과 바캉스로 간 바닷가와 시골 별장은, 내가 아무리 프랑스 곳곳을 뒤지고 다녀도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이 글을 얼마나 공들여 썼는지, 자기 글의 재료들에 대해 얼마나 심사숙고했는지는 행간이 말해준다. 파리에 사는 한국인, 파리지앵과 결혼한 동양 여자, 디자이너다운 내밀한 감각의 소유자, 이웃과 동네를 사랑하는 호기심 많은 주민, 이 모든 정체성이 그녀의 손끝에서 모아져 이 책이 나왔을 것이다.


  이 검푸른 책은, 파리에 가고 싶다는 욕망 대신, 내가 어느 낯선 곳에서 살게 되면 꼭 갖고 싶은 호기심과 배려, 따뜻하지만 선을 넘지 않는 관심, 그것들을 쿨하게 묘사할 글솜씨를 욕망하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끝난 사람이 다시 태어나기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