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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ug 22. 2018

신의 본심은 무엇일까

영화 <First Reformed> (2017)

  자살을 금기시하는 기독교에서 자살하려는 목사, 그것도 혼자 죽는 게 아니라 자살폭탄테러를 하려는 성직자를 만난다는 건 영화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신이 만든 세상을 지키기 위해, 즉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테러를 감행하려는 목사의 고뇌와 부조리는 이상하리만치 설득력 있고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무채색에 가까운 서늘함이 그려내는 경악스러운 현실과 환상적인 사랑이 묘하게 매칭 되는 화면은 이 영화의 묵직한 주제를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과연 신의 뜻은 무엇인지, 나약하지만 사악한 신의 피조물이 또 다른 피조물을 파괴하며 살아가는 현실이 어떤 식으로 심판받을지, 이 이야기는 아무도 모르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의 본심을 들여다보게 싶게 한다.




톨러 목사와 메리


  퍼스트 리폼(First Reformed)은 1767년 뉴욕 스노우브리지에 세워졌고, 이민자들에 의해 1801년에 완공된 '풍요로운 삶의 역사적 교회(An Abundant life History Church)'다. 담당 목사 톨러(에단 호크)는 중병에 걸린 40대 남자다. 집안 전통을 따르다 아들을 군대에서 잃은 후 기념품 전시장이 된 작은 교회에서 고독하고 한적한 생활을 한다. 어느 날, 그는 신도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부탁으로 그녀의 남편 마이클을 상담한다. 그는 자연이 파괴된 병든 지구에서의 삶에 공포를 갖고, 임신한 아내를 두고 2세마저 거부하는 극단적인 환경운동가다.


  "당신이 이 세상에 아이를 데려오는 것에 대한 절망은 이 세상에서 아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절망에 절대로 비교할 수 없어요." 톨러는 절망 없는 삶은 희망 없는 삶이라는 역설로 마이클을 설득하려 한다. 메리는 남편의 자살폭탄테러 계획을 감지하고 톨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톨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얼마 후 마이클은 자살한다. 그의 유언에 따라, 대기업의 유독성 폐기물 처리장에서 장례식까지 치러준 톨러는 곧 세상의 압박과 횡포에 직면한다.


  퍼스트 리폼 교회 2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며 대기업 바크사의 재정적 도움을 받은 '풍요로운 삶'측은 톨러에게 정치적 행동을 자제하라고 경고한다. 오염 구역에서 치러진 자살한 환경운동가의 장례식을 트집 잡은 것이다.


  톨러는 예수에게 순종하지만 점점 살기 어려워지는 현실을 원망하는 신자들에게 순종에는 번영이 따르지 않는다고 설교한다. 그분의 가르침에 달러표시나 성조기가 없다고 하는 말은 곧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신과 종교 자체를 불신하는 현대의 탐욕스러운 인간들은 (신에 대한) 순종의 대가로 부와 번영을 노골적으로 갈구한다. 자연은 파괴되다 못해 생태계를 위협할 수준으로 오염되었고, 희망 없는 시대에 자라는 아이들은 방치되어 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신의 자비와 은총을 느낄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한 톨러는, 환경오염을 외면하고 교회마저 (자연 파괴를 조장하는) 대기업의 횡포에 장단 맞추는 것이 진정한 신의 뜻인지 의구심을 갖는다.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신의 또 다른 피조물인 자연을 파괴하는 게 합당하냐는 그의 질문에 돌아온 다른 목사의 대답은 "하느님은 40여 일간 홍수로 이미 한번 피조물들을 죽이셨어..."이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망가뜨린 자연 또한 신의 뜻일지도 모른다며 현실적이 되라는 친구의 충고에 톨러는 절망한다. 마이클에게 절망 없는 삶은 희망 없는 삶이라 했던 역설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은 것이다. 그는 환경파괴에 대한 자괴감과 분노에 치를 떤다. 결국 병든 자신의 몸을 대의를 위해, 경각심을 일깨울 제물로 바칠 결심을 한다.  


절망으로 분노하는 톨러 목사


  퍼스트 리폼 재봉헌 행사에는 교회 관계자와 오염물질 배출 기업 바크사 대표를 비롯한 지역 유지가 참석한다. 그날 (숨겨뒀던) 마이클의 자살 테러용 조끼를 입고 행동하려던 톨러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행사에 참석한 메리를 보자 조끼를 벗어던진다. 그리고 예수가 순교를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듯 쇠로 만든 가시 밧줄로 자신의 몸을 칭칭 감은 후 메리와 극적으로 해후한다.  


  톨러가 신앙에 근본적 회의와 의문을 갖게 한 것도, 자괴감과 분노에 불을 지피고 실천적인 행동을 유도한 것도, 과격한 순교(?) 계획을 전향시킨 것도 메리다. 그녀는 희망이 결핍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다. 세상에 아이를 내보내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의 곁에서도 꿋꿋하게 아이 낳길 희망했다. 지구의 재앙을 지켜보는 남편의 시선을 공유하지만 절망은 공유하지 않은 메리는, 이 파괴되고 오염된 세상에서도 살고 싶고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 평범한 여자다. 그녀의 본능적인 꿈틀거림이,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생명력이 톨러를 절망과 희망의 롤러코스터에 태우고 질주하게 한 것이다.


평범한 구원의 여신 메리

  그들의 사랑이 지구를 구할 만한, 이 멸망의 목전에 닿은 파괴를 상쇄할 만한 에너지가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톨러의 자살 테러가 성공해 오염물 배출 기업의 오너가 한 명쯤 죽는다 한들, 지구 환경이 눈에 띄게 나아지진 않을 것이다. 경각심으론 부족할 정도로, 시시각각 파괴되는 생태계는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의 목을 조르고 있다. 알면서도 탐욕을 멈추지 못해 정치적 자본주의적 논리로 애써 외면하는 세상에서 한 작은 교회의 목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을 파괴하는 걸 묵인하는 게 신의 본심일까. 대체 신의 뜻은 무엇일까. 희망이 결핍된 시대에 우리는 신에게 무엇을 사죄하고 무엇을 구원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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