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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ug 23. 2018

선 안의 삶 VS 선 밖의 삶

영화 <서치 SEARCHING> (2018)

※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에서 본 영화입니다.  


  랜선 안과 밖. 그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며 디지털 노마드로 사는 현대인에게 이 영화 <서치 Searching>는 삶의 패러다임이 바뀐 현실에 발맞춰 변화한 상징적인 영화임에 틀림없다.   



  컴퓨터가 부팅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PC에 담긴 영상 통화와 스케줄러, 홈비디오와 문자 메시지는 아이의 출생과 성장, 엄마의 투병과 죽음까지, 한 가족의 행복과 시련의 히스토리를 고스란히 재생시켜 준다. 차가운 기기와 디지털 기호에 담긴 따뜻한 추억과 감성은 낡은 사진첩과 옛 편지를 꺼내보는 것 못지않게 보편적인 감성을 자극한다. 스케줄러에 암 투병 중인 엄마의 퇴원 날짜가 점점 미뤄지다 사라지는 씬은, 말이나 눈물 없이 엄마의 죽음을 알려주면서도 감정의 파장은 상쇄시키지 않는다. 나중에 나오지만, 엄마 계정의 작업 표시 줄에 694일간 업데이트하지 않는 노턴 안티 바이러스 알림창은 엄마가 없는 694일 동안 딸과 아빠가 견뎠을 시간을 짐작케 한다.  


영상 통화중인 마고와 데이빗


  IT 엔지니어인 한국계 미국인 데이빗(존 조)은 딸 마고(미셸 라)와 모바일로 소통하며 일상을 공유한다. 언제 어디서든 영상통화를 하거나 사진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두 사람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기기의 전원이 꺼지고 계정이 비공개가 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은 가장 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 악몽 같은 상상은 현실이 된다.       


  한밤 중 부재중 전화 세 통만 남긴 채 마고가 사라진다. 딸의 노트북으로 각종 SNS 계정을 뒤지며 딸의 흔적을 추적해 가는 데이빗은 그동안 몰랐던 아이의 진심을 알게 되고, 소통하지 못했다며 자책한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PC 모니터 화면과 그 속의 모바일 기기 창은, 단서를 수집하고 추적해 딸을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아빠의 심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건 현장이나 다름없다. 피 한 방울, 총알 하나 없이 이렇게 집요하고 필사적인 사건 현장은 처음이다. 그러면서 신경줄을 바짝 조이는 긴장은 점점 고조된다.  


딸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찾아가는 데이빗


  데이빗은 딸의 흔적을 좇아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텀블러 등 온갖 SNS 계정을 뒤지고 1인 미디어 방송 사이트까지 찾아본다. 경찰에 실종신고를 한 뒤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데이빗의 모습과 더불어 SNS와 CCTV 영상, 담당 형사와의 대화창이 떠 있는 PC 모니터가 스크린을 채운다. 심지어 라이브 뉴스 중계방송도 PC에서 재생된다. 오프라인의 현실까지 온라인의 프레임에 가두어 보여주는 화면은 답답하거나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우리가 PC나 모바일 기기를 통해 콘텐츠를 소비하고 각종 정보를 받아들이며 타인과 소통하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기 때문이다. 온/오프의 경계 없는 세상을 구현해 낸 차칸티 감독은, 디지털 기기 사용자의 아날로그적 감성 또한 디지털스럽게(?) 보여준다. 데이빗의 딸에 대한 감정을 타이핑 속도와 끊임없이 명멸하는 커서의 깜빡임으로 나타낸 것, 문자를 장황하게 썼다 지우면서 드러내는 갈등과 자책은 아빠의 불안과 회한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데이빗은 딸의 노트북을 뒤지며 지금껏 몰랐던 아이의 생소한 모습에 당황한다. 그동안 내 딸을 너무 몰랐다고 하는 자책은 아빠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심정이지만, 온라인에 존재하는 흔적이 과연 실체의 본모습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실종 수사가 진행될수록 마고에 대한 진실도 드러나지만, 그에 못지않게 허황된 가십과 루머가 생산된다. 마고와 친하지 않다고 했던 여학생은, 그녀의 절친 행세를 하는 감성팔이 동영상을 업로드해 조회수를 올린다. 마고를 찾는다는 해시태그는 위선에 가까운 SNS 캠페인으로 유행처럼 번지고, 남의 불행을 재미로 악용하는 이들에게 데이빗은 상처받는다. 심지어 아빠인 데이빗이 범인이라는 악의적 조롱과 음모론까지 번진다.


딸의 수색작업 현황도 PC화면에서 재생된다


  온라인에선 실체의 검증과 진실 여부를 가릴 여과 장치가 희박하다. 불가능과 한계가 없는 그 세계에선 즉흥적이고 자극적인 주장과 콘텐츠가 무한히 생산되고 복제된다. 해킹이 가능하며, 사생활 보호의 성역은 없다. 비공개 계정도, 패스워드도 어렵지 않게 뚫리고 범죄에 악용된다. 실제로 데이빗은 딸을 찾겠다는 정당한(?) 목적으로 패스워드를 재지정하고, 딸의 비공계 계정도 클릭 몇 번으로 손쉽게 진입한다. 물론 그의 목적은 합당하고 숭고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두 개의 세상(온/오프)을 사는 대가로 우리는 상상하기 끔찍한 일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프라인의 수색이 별 성과 없이 끝나는 것과 대조되게 온라인 흔적을 추적하던 데이빗은 딸의 실종에 대한 단서와 진범을 알아내는 데 성공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온라인 세상의 불완전성이 데이빗으로 하여금 딸을 찾는데 기여한다. 그가 딸의 비공개 계정을 뚫고 패스워드를 재지정하지 않았다면, 손쉽게 검색 가능한 진범의 온라인 정보를 눈여겨보지 않았더라면, 딸이 오랜 기간 대화한 아이디가 조작된 거라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이 사건은 비극으로 마무리됐을 것이다. 누구라도 진입 가능하고 공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에선 누구라도 범죄자가 되고 희생자가 될 수 있지만, 역으로 누구라도 범죄자를 알아내고 희생자를 구할 수 있다. 오프라인의 물리적 한계와 장벽은 온라인에선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물리칠 수 있고, 의도하지 않은 정보와 진실이 노출되어 악용 내지 선용될 수 있다. 정말 무서운 사실은, 애초에 마고가 거짓 아이디에 속고 범죄에 희생되는 것 자체가 온라인 소통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싹튼 사소한 거짓과 은닉이 오프라인에서 사건과 범죄로 이어지고, 결국 온라인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수색작업에 동참한 데이빗과 피터


  딸과 소통하지 못했던 아빠가 온라인을 통해 딸의 진심을 아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부모에게라도 말하고 싶지 않은 내밀한 사생활을 사수하고 싶은 자식의 인격에 대한 존중은 어디까지 지켜져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오프라인에서는 물리적 경계선을 긋고 선 안과 밖을 조심스럽게 넘나드는 주의만 있으면 선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 부모가 다 큰 자식 방을 노크하고 들어간다거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지 않을 정도의 교양만 있으면 얼굴 붉힐 일이 없다. 온라인에서는 그 경계가 모호하고 진입 장벽은 너무 허술하다. 내 SNS 계정의 공개 여부를 내가 결정해도 간단히 뚫리고, 흔적을 없애는 것도 쉽지 않다.(지워도 복구가 가능하다)


  문제는, 이 모든 걸 알고도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온라인 계정을 안 쓰면 그만이지 않냐는 말은 현대인으로 살지 말라는 말과 같다. 디지털 기기를 최소화하는 삶은 나 혼자 지향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내가 세상의 공기를 전 지구인과 나누어 마시듯, 나의 존재 자체가 전 지구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프레임 안에 속해 있다. 온라인이라는 프레임 또한 계정 자체는 내가 선택하고 공개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지언정, 그 라인 밖의 삶을 선택하는 과감한 결정권은 내가 갖고 있지 않다. 내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안 해도, 나의 사진과 정보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의 SNS를 통해 공개되고 공유될 수 있다. 나의 행방은 나도 모르게 거리와 공공시설의  CCTV에 남고 일정 기간 디지털 정보로 보관된다. 차라리 자의적으로 내 정보의 공개 여부를 결정하는 게 그나마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미 존재하는 세상을 못 본 척하는 건 지구 안에서 지구 밖의 삶을 살겠다는 것과 같은 우매한 짓이다. 선 안의 세상은 선 밖의 세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전혀 상이한 또 다른 우주다. 이 새로운(어쩌면 더이상 새롭지 않은) 우주에서의 삶이 질서가 정립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길 바란다면, 당분간 개개인이 의식과 소양을 가지고 사는 수밖에 없을 듯싶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은 선 안과 선 밖의 삶이 뫼비우스 띠처럼 끝없이 연결되어 돌아간다. 분명한 건, Shut Down해서 PC를 꺼도 세상은 멈추지 않고 인생도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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