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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Sep 06. 2018

발로 차버리고 싶은 엄마

영화 <White Oleander> (2002)

  한 소녀가 어른이 되기까지 몇 명의 엄마를 극복해야 할까. 아니, 몇 명의 여자가 내뿜는 질투라는 암초를 헤쳐 나와야 할까. 마치 엄마가 딸(소녀)을 질투하는 인생의 적처럼 질문했지만, 엄마의 절대적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어린 소녀에게 '엄마의 질투'는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가장 가깝고 치명적인 독일 수밖에 없다.    



  아스트리드(알리슨 로만 Alison Lohman)는 아름답고 자유로운 예술가 잉그리드(미셸 파이퍼 Michelle Pfeiffer)의 딸이다. 우아하지만 독선적인 잉그리드는 딸을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키우지만 은연중 자신의 이상을 주입시킨다. 어린 소녀 아스트리드에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절대적인 여신과 같은 존재다.


아름다운 소녀 아스트리드

  남자를 믿지 않던 잉그리드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살인을 저지른다. 엄마가 체포되자 열다섯 살 소녀 아스트리드는 정부 보호 시설에서 위탁가정으로 가게 된다. 첫 번째 양어머니 스타(로빈 라이트 Robin Wright)는 젊은 남편(정확히는 동거하는 남자 친구)이 아스트리드를 보는 눈길에 불안해하다, 그녀에게 총을 겨눈다. 두 번째 양어머니 클레어(르네 젤리거 Renee Zellweger)는 아스트리드를 따뜻하게 돌봐주지만 늘 부재중인 남편 때문에 괴로워한다. 세 번째 가정은 아스트리드가 스스로 택한 곳으로 최악이지만 자유로운, 범죄자 양성소 같은 곳이다. 첫 번째 위탁 가정에서도, 두 번째 가정에서도 엄마 잉그리드의 이기심과 독단, 그리고 양어머니들의 질투와 속사정 때문에 상처 받았던 아스트리드는 엄마와의 단절을 결심한다.  


아스트리드와 엄마 잉그리드

  아스트리드가 거쳐간 세 엄마는 엄마이기 전에 여자이자 인생 선배로 그녀에게 세상의 따뜻함과 비정함을 동시에 맛보게 한다. 아름답고 자존감이 강한 잉그리드는 구속 중에도 딸을 지배한다. 엄마는 어리고 연약한 딸에게 세상에 휘둘리지 말고 독립적으로 살라 하지만, 정작 자신이 딸을 휘두르는 걸 알지 못한다. 그녀야 말로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 올랜더 꽃에서 추출한 독으로 남자 친구를 살해한 여자다.  


첫번째 양엄마 스타


  스타는 남의 남자를 뺏어 살면서, 어린 양녀들을 감시하며 노골적으로 질투한다. 클레어는 가장 엄마다운 심성을 지녔지만, 출장 중인 남편이 외도한다 의심하며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아스트리드가 클레어에게 의지하는 걸 본 잉그리드의 이기적인 시기 때문에 그녀는 자살한다. 아스트리드는 위탁 가정에 가기 전에 머문 보호 시설에서도 또래 여자애들의 노골적인 시기와 적대에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기까지 한다. 그녀는 엄마들을 비롯한 세상 여자들이 질투에 사로잡혀 자신을 멋대로 휘두르는 걸 경험한 후 힘겹게 홀로 선다.  


두번째 양엄마 클레어


  유독 아스트리드에게 질투의 시선이 꽂히는 이유는 아름답고 연약한 그녀가 특별한 미적 감수성까지 지녔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아름다움은 선망과 동시에 시기의 대상이 되기 쉽다. 타고난 운명이라고 하기엔 가혹하지만, 특별함이 주는 아우라는 훔치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다. 아스트리드는 (친엄마를 비롯한) 세상 여자들에게 분노하지만 용서하는 법도 배운다. 조금 더 아름다운 그녀는 조금 더 혹독하게 인생을 시작한다. 기특하게도 그녀는 자신이 지닌 매력을 무기가 아닌 재능으로 발전시킨다. 이 또한 조금 더 특별한 그녀가 깨달음을 얻고 용기를 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보호 시설에 있는 아스트리드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한 소녀가 세상의 적의와 사랑을 동시에 받으며 성장하는 모습은 뭉클하지만, 솔직히 나의 마음을 크게 자극하지는 못했다. 이 영화가 세상에 통용되는 보편적인 엄마와 딸의 이야기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잉그리드처럼 독립적이고 자아가 강한 엄마는 내 시야 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잉그리드는 말 그대로 여신처럼 나온다. 살인 용의자라는 정체성도 그녀의 당당한 아우라를 훼손하지 못한다. 자기 엄마를 보며 고생과 희생에 연민을 느끼는 딸들은 많지만, 여신으로 우러러보는 딸은 거의 없다. 엄마와 여신은 참...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인 조합이다. 내가 너무 솔직했나. 어쨌든 예술가 엄마와 딸의 이야기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여자와 여자'의 이야기로 와 닿았다.


  엄마의 포기와 딸의 홀로서기가 너무 당연하고 그다지 마음 아프지 않은 건 둘 다 충분히 강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다워서 강한 것인지 강해서 아름다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모녀가 서로 닮은 것만은 확실하다. 닮았지만 서로 다른 인생을 사는 게,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는 발로 차버리고 싶은 인생관보다 훨씬 건설적이다. 누가 엄마처럼 살고 싶겠는가, 설사 그녀가 여신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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