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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Sep 14. 2018

관상, 궁합, 명당.. 다음은 작명?

영화 <명당> (2018)

*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에서 본 영화입니다.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를 알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나약한 인간은 온갖 구실과 비방을 끌어다 앞날을 꿰어 맞춰 불운을 피하고 윤택한 삶으로 바꾸려 애쓴다. 미지의 시간은 불안하고 아득하다. 인간의 생은 이 미지와의 투쟁이고, 앞날을 꿰차고 싶은 불손한 욕망의 몸부림 그 자체다.



천재지관 박재상과 친구 구용식


  올해도 어김없이 그럴듯한 사극 영화가 명절의 고단함(?)을 풀어주기 위해 대기 중이다. <관상>, <궁합>, <명당>으로 이어지는 역학 3부작은 소재는 각기 다르지만, 미지의 생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과 욕망을 그린 서사들이다.

  그중에서도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하는 <명당>은 유독 오늘날을 빗댄 듯한 장면이 많다. 지관 박재상(조승우)과 구용식(유재명)이 시험 운이 좋은 터에 지은 집을 매매하는 장면이나, 유동인구가 줄어 죽어버린 저잣거리 상권을 되찾게 해주는 장면에선, 오늘날 강남 8학군과 대형 마트 때문에 피해 보는 재래시장이나 골목 상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마침 어제 발표된 '9.13 부동산 대책'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땅 투기로 대변되는 인간의 그릇된 욕망에 대한 또 하나의 미봉책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김좌근과 헌종


  흥선(지성)이 외척 김좌근(백윤식) 호령에 무기력하게 무릎 꿇는 헌종(이원근)을 훔쳐보며 하는 말, '이게 어찌 왕실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는 2016년과 2017년을 살아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권위와 신뢰를 잃은 왕과 그런 왕을 쥐고 흔드는 탐욕스러운 사대부의 호령은, 어리석은 지도자의 말로를 아는 후손의 눈에 안타깝고 슬픈 장면으로 새겨질 수밖에 없다.

  명당에 집착하는 왕가와 사대부들, 집터와 풍수에 예민한 저잣거리 서민들까지, 200년을 사이에 두고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사람들을 보면 차라리 명당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를 소망하게 된다. 인간의 탐욕은 없는 명당도 만들어내고, 산을 깎고 물길을 틀어서라도 풍수지리마저 조작할 거라 예상되긴 하지만.


헌종의 아버지 효명 세자의 묘자리를 정하는 의식


  천재 지관 박재상은 몰락한 왕손 흥선과 함께 세도정치를 일삼는 김좌근 일가를 무너뜨리려 한다. 김씨 일가가 왕실의 땅을 편법으로 매입하고 조상 묘까지 몰래 왕묘에 쓰는 등 만행과 패악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장동 김씨들이 묫자리에 집착하며 땅 투기를 하는 것은 조상의 묘를 잘 써서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고 천자(왕)까지 배출하겠다는 욕망 때문이다. 흥선 또한 다르지 않다.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온다는 땅에 집착하며 끝내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넌다.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까지 저지르며 왕의 성씨를 갈아보겠다는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김성균)와 '상갓집 개'라는 파락호를 벗어나 자식을 왕으로 삼으려는 흥선을 보며 박재상은 절규한다. 2대에 걸쳐 왕이 나온다 한들 나라가 망하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만 이미 탐욕에 눈이 뒤집힌 이들은 귀마저 닫고 욕망의 불구덩이에 몸을 던진다.


지관 박재상
흥선 이하응


   미래를 아는 후손으로써 어리석은 이들의 행태에 안타까움을 너머 깊은 한숨이 난다. 역사적 사실은 뼈대일 뿐 가공된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보는데도 절망스러운 기분까지 드는 건, 이 영화가 몰입하게 만드는 서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배우들의 명연기에, 익숙한 역사적 배경과 기시감이 느껴지는 땅 투기에 대한 장면들은 쏠쏠한 재미와 더불어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한다. 지관들이 명당이라 짚어준 말죽거리, 안골, 헌릉은 오늘날의 강남이다.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충청도 덕산에 쓴 것도 사실이니 고증이 필요 없는 허구라 해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김좌근을 몰아내기 위해 의기투합한 흥선과 박재상


  추석 연휴를 겨냥해 개봉하는 영화이니 한 마디 덧붙인다면, 조상묘를 잘 써서 복 받은 후손들은 명절에 차례 지내지 않고 해외여행 간다고 어느 유부녀가 말했다. 왠지 그럴듯하다. 앞으로 200년 후엔, 200년 전에 부동산 투기로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낸 자들의 후손이 화성 땅을 투기하는 현실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시간이 흘러 빼앗긴 나라의 백성이 된 노인 박재상과 구용식이 독립운동하는 젊은이들에게 무관학교 자리를 점찍어 주며 '신흥 무관 학교'라고 이름까지 지어준다. 이 장면을 보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만일 역학 시리즈 영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마지막은 '작명' 혹은 '개명'이 되지 않을까? 시대적 배경은 조선 시대가 아닌 일제강점기로, 창씨개명을 해야 하는 나라 잃은 백성들의 절박함 속에서 앞장서 이름을 바꿔 침략자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매국노들이 나오는 영화 말이다. 관상이나 궁합, 명당으로 탐욕을 드러낸 인간이 이름으로 못 드러낼 이유는 없다. 이 비틀린 욕망의 화신들을 2년 혹은 3년 뒤 추석에 볼 수 있을지, 한 번 기다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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