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짠밥'으로 몬테네그로어에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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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화요일
올해 몬테네그로에 2년 임기의 평화봉사단원으로 온 사람은 모두 열다섯 명이다. 우리는 3개월 동안 페추리체라는 작은 도시에서 함께 모여 몬테네그로어와 문화 교육을 받고 있다. 이들 평화봉사단원들은 해외 여행이나 국제 이슈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대체로 일반 사람들보다 다양한 문화를 접해 본 경험이 많다. 또 다른 나라 언어를 한두 가지쯤은 이미 해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열다섯 명 모두에게 몬테네그로어는 처음이다. 모두다 백지장에서 출발했다. 평소 외국어 학습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이들이 새로운 언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습득해 나가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꽤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특히, 지난 50년간 영어를 지긋지긋(?)하게 배워온 나로서는, 영어 모국어 친구들이 전혀 다른 언어를 어떻게 배워 나가는지가 더 궁금했다. 아직 몬테네그로어를 함께 배운지 2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들의 언어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 꽤 다르다는 걸 벌써 느낀다.
우리가 받는 3개월 언어 과정은 상당히 집중적이다. 교재 기준으로 보면 2년 분량의 성인 언어 과정을 3개월로 압축해 놓은 수준이라고 한다. 그러니 하루하루 쏟아지는 학습량이 만만할 리 없다. 복습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하루만 빠져도 따라가기 벅찰 정도다. 그래서인지 첫 이틀 수업을 마치고 나자 모두가 한 번씩 좌절 모드에 빠졌다. 너무 많은 양, 너무 복잡해 보이는 언어 앞에서 과연 이걸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다.
그래도 나는 지난 50년간 영어로 단련된 학습 경험 덕분인지, 힘들긴 해도 ‘못 할 정도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다고는 하지만, 영어만큼 어렵겠어? 하는 마음도 솔직히 있었다. 그래서 영어 공부하던 때처럼 전투적으로 임하고 있다. 단어를 외우고, 문법을 익히고, 계속 읽고 쓰고,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건네고 말을 붙인다. 슈퍼마켓에서 계산대 직원에게 한마디 더 하고, 학교에서 마주치는 초등학생들과도 배운 표현을 복기하며 연습한다. 이 과정이 사실은 즐겁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빨리 익혀야 한다’는 전투적인 긴장감이 깔려 있다.
미국인 친구들은 꽤 당황한 모습이다. 그동안 배웠던 스페인어나 프랑스어와도 많이 다를 뿐 아니라, 몬테네그로어 자체가 워낙 복잡하고 예외가 많고, 3개월 집중 코스에서 요구하는 학습량이 그들이 경험해 온 언어 공부의 밀도보다 훨씬 높아서 더 힘들게 느끼는 듯하다.
특히 몬테네그로어는 명사가 단수·복수뿐 아니라 남성·여성·중성으로 나뉘고, 그에 따라 형용사와 동사의 어미가 계속 바뀌는 언어다. 동사는 규칙동사만 있어도 벅찰 텐데, 불규칙 동사가 워낙 많아 상당 부분을 그냥 외워야 한다. 심지어 고유명사조차 어미가 변한다. 사람 이름도 문장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Emina라는 이름도 목적어가 되거나 전치사 뒤에 오면 Emine, Eminu 등으로 바뀐다!!!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나도 혀를 내둘렀다.
미국 친구들의 가장 흔한 반응은 이거다.
“왜 이건 이렇게 변해?”
“규칙이 뭐야?”
“이건 왜 규칙을 안 따라?”
그런데 이런 질문을 영어 공부하면서 수없이 경험해 온 나는 미국인 친구들에게 "영어에도 그런 게 얼마나 많은데 니들이 몰라서 그래!!!" 라고 한마디 한다. 불평하는 이들이 얼마나 얄밉던지 ㅎ.
이들은, 몬테네그로어 동사가 1인칭, 2인칭, 3인칭마다 이렇게 다르게 변하는 게 말이 되냐고 하면, 영어의 be 동사도 am, are, is, was, were로 바뀌지 않느냐고 말해준다. 또. 소유격이 왜 이렇게 복잡하냐고 하면, 내가 중학교 때 노래처럼 외웠던 I, my, me, mine / you, your, you, yours / he, his, him, his / she, her, her, hers를 줄줄이 읊어준다 (와~~ 40년만에 외워본다 ㅎ).
그러면서 "나도 영어 배울 때 이해해서 외운 게 아니라 그냥 외웠다. 어떤 건 이해가 안 된다. 영어도 그렇다. 모든 언어가 다 그렇다. 그러니 너무 불평하지 말자고." 말한다.
영어를 모국어로 자란 사람들은 다른 언어를 조금 한다고 해도, 결국 영어 중심적인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반면 영어 때문에 이미 지독한 고생을 한 나는, 몬테네그로어가 복잡하긴 해도 어느 정도 맷집이 생긴 것 같다. 짠밥이 이런 데서 나오나 보다.
그런데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는데도 유독 잘하는 친구가 한두 명 있다. 흥미로운 건 이 친구들이 수업 시간에 필기를 유난히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집중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딱 두 가지다. 뻔뻔함, 그리고 현지인 흉내내기. 틀려도 그냥 말하는 걸 즐긴다. 문법이나 단어 변형은 틀려도 억양은 정말 좋다. 주눅 들지 않고 ‘말하는 것 자체’에 집중하는 태도, 그게 비법인 것 같다.
나도 좀 더 뻔뻔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틀려도 그냥 내뱉는 것. 오늘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과속 단속을 하고 있던 경찰관을 만났다. 인사를 하고 더듬거리는 몬테네그로어로 몇 마디를 나눴다. 몬테네그로어를 배운 지 2주밖에 안 됐다고 하자 그가 놀란다. 자기 나라 언어는 명사나 동사 하나가 일곱 가지 형태로 변형되는 정말 쉽지 않은 언어라면서,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라고 했다. 자기 언어가 복잡하다는 걸 알기에, 그 언어를 조금이라도 하려는 외국인을 더 귀하고 고맙게 느낀다는 말도 덧붙였다.
60억 명의 영어 사용자 중 한 명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60만 명 중 한 명으로 몬테네그로어를 하는 사람에 속하는 것도 꽤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몬테네그로어, 고고씽이다.
사진
1) 오늘 길거리에서 만나 몬테네그로어로 얘기를 나눈 경찰관과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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