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 사원에는 기묘하면서도 괴기한 형상을 한 상상의 동물들이 많이 조각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기괴한 모습을 따지자면 단연 '마카라(Makara)'를 꼽을 것이다.
마카라로 장식된 크메르 사원의 장식 린텔[태국 프란나차부리 박물관] ⓒ 박동희
마카라는 큰 머리와 긴 코가 특징이다. 물을 내뿜는 속성을 가진 물 속에 사는 괴수로, 상반신은 육상동물, 하반신은 수생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코끼리의 코, 악어의 턱, 쥐의 귀, 돼지의 이, 공작의 꼬리털, 사자의 발 등 다양한 동물들의 특징이 조합된 것이다.
(좌) 인도 Araanath Jain 사원의 마카라 ⓒ Daniel(CC.4.0) (중) 베트남의 마카라[다낭 박물관] (우) 인도네시아의 마카라[Pawon 사원] ⓒ 박동희
마카라는 인도에서 유래하여 동남아시아에 널리 전파된 상상의 동물이다. 힌두 신화에서는 물의 신 바루나(Varuna)와 강의 여신 강가(Ganga)의 바하나(Vahana, 타고 다니는 동물)로 묘사된다. 시바 신이나 비슈누 신과 같이 힌두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신들과 관련성이 낮은 편이라 종교적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물'을 다루는 동물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어, 고대로부터 농경이 중시되어 온 인도의사원 건축에서 단골 장식 요소로 사용되었다.
(좌) 마카라를 타고 있는 물의 신 바루나[1820] ⓒ British Museum(Public), (우) 마카라를 타고 있는 강의 여신 강가 ⓒ G41rn8(CC BY-SA)
앙코르 지역도 농경이 인도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사회였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종교적인 중요성이 다소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물을 뿜는 괴수 마카라는 크메르 사원 건축을 장식하는 단골 요소로 사용되었다. 오히려 인도에서보다 더 많이 보이는 듯하다.
마카라로 장식된 크메르 사원의 장식 린텔[태국 프란나차부리 박물관] ⓒ 박동희
우선 가장 이른 시기의 마카라부터 살펴보자. 위의 사진은 태국 프란나차부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삼보 프레이 쿡 양식(7세기)의 린텔이다. 위의 린텔을 살펴보면 린텔의 좌우에 큰 입을 벌리고 있는 마카라가 마주 보고 있다. 가운데에는 아치 모양의 밴드가 위치하는데 마치 마카라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묘사하는 듯하다. 밴드의 중앙에는 세 개의 원형 장식이 꽃과 새로 장식되어 있다. 밴드의 안쪽도 그리고 아래쪽도 꽃으로 가득하다. 특히 아래쪽으로 피어있는 꽃들은 마치 사원 안으로 들어오는 참배객들을 축복하는 듯하다.
(좌) 마카라로 장식된 크메르 사원의 장식 린텔[태국 프란나차부리 박물관] / (우) 삼보 프레이 쿡 스타일 마카라[캄보디아 콤퐁톰 박물관] ⓒ 박동희
마카라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물고기와 같은 유선형의 짧은 몸통에, 큰 머리가 특징적이다. 크게 벌린 입은 악어를 닮았고, 긴 코는 살짝 말려서 들어 올려져 있는데 흡사 코끼리 코다. 꼬리는 원형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는데, 공작이라고 하기보다는 넝쿨과 같은 식물 문양으로 보인다. 동물의 몸통이 끝없이 이어진 식물 문양으로 변화하는 표현 양식은 앙코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마카라의 등에는 남성형 신과 같은 인물상이 각각 조각되어 있다.
프레아 코 사원[9세기 후반]의 린텔과 마카라 ⓒ 박동희
다음은 프레아 코 사원의 린텔이다. 프레아 코 사원은 879년에 건립된 사원이며, 이 시기에 건립된 사원들을 프레아 코 양식(9세기 후반)으로 분류한다. 가운데에 원통형 밴드가 아치형으로 뻗어 있고, 밴드 아래위로 남성형의 신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위쪽에 배치된 신들은 말을 타고 있고, 아래쪽에 위치한 신들은 나가를 타고 있는 점을 보아 위는 땅, 아래는 물로 구성되어 있는 듯하다. 동물 문양들은 식물 문양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린텔의 양 끝에 마카라가 각각 한 마리씩 배치되어 있는데, 앞서 본 린텔과 달리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다.
프레야 코 시기의 마카라는 앞서 살펴보았던 삼보 프레이 쿡 시기의 형태와 많이 달라졌다. 큰 머리와 코끼리의 코, 그리고 뿜어 내는 생명력 넘치는 물줄기, 동그랗게 말린 식물 문양의 꼬리 등의 특징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몸통이 확연하게 육상동물로 바뀌어 표현되었다. 앞다리와 뒷다리 그리고 체형이 마치 사자같다. 자세히 살펴보면 목 주변에 사자의 상징인 갈기도 보인다.
바콩 사원[9세기 후반]의 린텔과 마카라 ⓒ 박동희
동 시기의 사례를 하나 더 살펴보자. 위의 사진은 앞서 본 프레아 코 사원보다 2년 뒤인 881년에 건립된 바콩(Bakong) 사원의 린텔이다. 앞서 본 린텔보다 좀 더 단순한 형태이지만 프레아 코 양식에 해당한다. 동 시기의 린텔임에도 아치형 밴드에 원형 꽃 모양이 남겨져 있다거나, 마카라의 입에서 아치형 밴드가 뿜어져 나오는 듯 한 배치에서 과거 삼보 프레이 쿡 양식의 흔적들이 더 많이 남겨져 있다. 마카라의 형태도 초기 형태의 마카라와 조금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육질의 앞다리, 그리고 목 주변의 갈기 등 사자의 몸으로 변화된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프놈 복 사원[10세기 초반]과 마카라 ⓒ 박동희
위의 사진은 10세기 초반에 건립된 프놈 복 사원이다. 세월의 풍파를 맞아 훼손이 심한데, 다행스럽게도 마카라가 조각된 부분은 남겨져 있다. 악어의 입, 코끼리의 코를 통해 마카라임을 유추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몸통의 묘사는 생략되어 있다. 마카라는 사원 바깥 방향을 향해서 입을 벌리고 있으며, 긴 코에서 물줄기를 뿜고 있다. 사원이 가진 생명력을 사원 바깥으로 뿜어내는 듯한 묘사로 보인다. 마카라의 코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는 앞서 보았던 양식과 유사하게 식물 문양으로 변화하고 있다. 붕괴된 사원에서 다음과 같은 마카라의 흔적들을 더 찾을 수 있었다.
프놈 복 사원[10세기 초반]의 마카라 장식 부재들 ⓒ 박동희
반띠아이 스레이 사원[10세기 후반]의 마카라 ⓒ 박동희
위의 사진은 10세기 후반에 건립된 반띠아이 스레이 사원이다. 페디먼트의 좌우 끝부분이 마카라로 장식되어있다. 역시 사원의 바깥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앞서 프놈 복에서 본 마카라는 머리만 표현되어 있었는데 이 사원에서는 내림마루를 장식하는 긴 식물 문양이 마치 마카라의 몸통과 같이 이어져, 마카라 몸통이 뱀처럼 보인다. 또한 앞서 본 마카라들이 물줄기나 식물 문양을 뿜고 있는 것과 달리 입에서 동물들이 뿜어 나오도록 묘사되어 있다. 확대한 사진의 왼쪽 마카라는 입에서 타오(사자)가, 오른쪽 마카라의 입에서는 나가가 나온다. 나가는 물을 상징하기에 마카라의 입에서 나가가 뿜어져 나오는 것은 의미상 연결이 되지만, 타오가 나오는 것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아마도 사원 장식의 바리에이션다양화 과정에서 나가에 상응하는 상상의 동물을 적용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정해 본다. 자세히 살펴보면 또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왼쪽 마카라는 명확하게 코끼리의 코가 확인된다. 하지만 오른쪽 마카라는 코가 짧다. 이 또한 마카라가 아닌 다른 동물을 넣어 사원의 장식과 의미 부여에 다양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11세기 이후 마카라의 표현은 크게 변화한다. 앞서 본 반띠아이 스레이 사원에서 확인된 코가 길고 타오를 뿜는 형태의 마카라는 사라지고, 코가 짧고 입에서 나가를 뿜는 형태의 마카라만 남겨진다. 위의 사진은 각각 바푸온 사원(11세기), 앙코르 왓(12세기 초반), 프레아 칸(12세기 후반)의 지붕 장식이다. 코가 사라진 뱀과 같은 괴수를 계속 마카라로 볼 수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상상의 동물일지 판단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배치되는 위치의 동일성이나 물을 뿜는 상징성에서 코가 짧아진 앙코르의 마카라도 마카라로 분류할 수 있을 듯하다.
한편 11세기 이후에는 마카라가 물을 뿜는 괴수라는 상징성이 정착되었고, 나가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마카라가 함께 묘사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마카라의 입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나가 난간이 등장하며, 벽면의 장식에서도 나가 문양과 함께 마카라가 따라 나온다.
(좌) 차우 사이 테보다 사원의 나가장식 난간, (우) 프레아칸 사원의 벽면 장식 ⓒ 박동희
한편 물을 뿜는 물의 괴수 마카라의 특징을 잘 반영한 기발한 표현이 간혹 크메르 사원의 배수구에서 확인된다. 몇몇 크메르 사원의 배수구 끝은 마카라의 머리로 장식되어 있는데, 비가 내릴 경우 마치 마카라가 물을 뿜는 것과 같은 모습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아래의 사진은 바콩(Bakong) 사원 기단 하부의 배수구이다. 배수구의 끝 부분에는 괴수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안타깝게도 윗부분이 깨져 있다.
바콩 사원 기단부의 마카라 모양의 배수구 ⓒ 박동희
아래의 사진은 프레 럽(Pre Rub) 사원의 기단에 설치된 마카라 머리 조각이다. 이 조각 역시 마카라의 코 부분이 손상된 상태였다. 그런데 주변에 마카라의 코로 보이는 조각이 떨어져 있어 파손부에 올려 보았는데, 딱 맞아 떨어졌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마카라 배수구들은 제 기능을 못한다. 우수가 돌 틈 사이로 새거나 다른 구멍으로 흘러나가 배수구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기 어렵다. 나오더라도 감질나게 흘러나오는 수준이다. 하지만 건립 당시 동남아시아 기후 상 우기 때 스콜이 내리는 것을 상상해 보면, 마카라의 입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와 상당히 운치가 있는 풍경을 연출했을 것이다.
프레럽 사원의 마카라 머리 모양으로 장식된 배수구 ⓒ 박동희
앙코르에서 마카라가 묘사되는 독특한 신화의 장면이 있다. 바로 비슈누 신이 태초의 바다 위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장면이다. 원전에 따르면 비슈누 신은 최초의 나가라자인 세샤 위에 누워있었다. 따라서 인도에서 이 장면은 대부분 나가가 그려져 있다. 하지만 앙코르에서는 나가 대신 마카라로 표현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마카라와 나가 모두 물과 관련된 상상의 동물이기에 이야기 상으로 대체되어도 이상하지는 않지만, 앙코르의 묘사는 원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앙코르에서 묘사된 특수한 모습이 원래 인도에서 유래되었는지 아니면 앙코르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고대 크메르인들이 마카라를 선호했던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좌) 마카라에서 쉬고 있는 비슈누신 린텔[태국 국립박물관], (우) 마카라에서 쉬고 있는 비슈누신 페디먼트[프레아칸] ⓒ 박동희
마카라 장식이 눈에 띄는 파놈렁 사원 주신전 정면 ⓒ 박동희
지금까지 앙코르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마카라들을 살펴보았다. 필자도 마카라를 처음 접하였을 때, 너무나도 낯설어서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고대 크메르의 역사나 사회, 그리고 사원의 묘사 방식 속에서 물의 중요성은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요소였다. 물의 중요성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그 물을 관장하는 마카라에 대해 생각해 보니, 고대 크메르 인들은 분명 마카라를 경외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망망 대해와도 같은 톤레삽 호수, 생명의 젖줄인 시엠립 강, 그리고 농경과 관련하여 필수적 요소였던 비. 이렇게 고대 크메르 인들의 풍요를 결정하는 물을 관장하는 동물인 마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크메르 사원을 장식하는 필수적인 요소로 사용되며 크메르 인들의 의식 속에 녹아든 중요한 상상의 동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