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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희 May 19. 2024

수호신이 된 식인귀 '하리티'

간다라 이야기 #20

일본 유학시절 많은 신사들을 둘러보았다. 신사에는 힌두교와 다신교의 대표 격을 경쟁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신들이 모셔져 있었다. 다만 신사에 모셔진 신들의 이름이 길기도 길었지만, 읽는 방법도 독특해서 기억에 남는 이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중 유난히 눈에 들어왔던 한 신이 있었다. 바로 '鬼子母神(귀자모신)'이었다. 어렵지 않은 한자로 구성된 것도 있었지만, 흥미로운 이름도 기억에 쉽게 남은 이유일 것이다. '자모신'이라면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칭하는 이름이니, 자애로운 신일 것 같으면서도, 앞에 '귀'자가 붙어있으니 사연이 궁금해졌다. 일본인 친구에게 귀자모신이 무엇인지 물을 기회가 있었는데, '아기를 점지해 주는 여신'이라 하였다. 당시에는 막연하게 한국의 '삼신할미'와 비슷한 거구나 하며 납득하고 넘어갔다.


일본 신주쿠 죠시가야에 위치한 귀자모신당 ⓒ Go Tokyo


그러다가 수년 뒤, 인도네시아 답사에서 귀자모신을 다시 만났다. 보로부두르 사원에서 3km 정도 떨어진 믄듯(Mendut)이라는 불교 사원의 입구에 큰 부조조각이 있었는데, 이 벽화의 주인공이 귀자모신이라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하리티(Hariti)'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미술사 교수님으로부터 이 하리티가 일본의 귀자모신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하리티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설화를 들을 수 있었다.


하리티는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 야차(야크시니)였다. 마을 사람들은 언제 하리티가 나타나 아이들을 잡아갈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 정작 하리티는 500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고, 특히 막내를 사랑했다.

하리티에게 아이들을 잃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도움을 요청하자, 부처님은 하리티의 막내아들을 숨겨버렸다. 하리티는 사랑하는 막내아들이 사라져 크게 상심하였다. 아이를 찾지 못한 하리티는 결국 부처님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였다.

부처님은 하리티에게 아이를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상심이 컸겠냐 하며, 숨겨두었던 막내아들을 내어주었다. 크게 깨우친 하리티는 불교에 귀의하였고, 이후 아이들을 지키는 신이 되었다.  

<하리티 이야기 요약>


사람을 잡아먹는 야차가 불교에 귀의하여 수호신이 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인도네시아 하리티 특유의 자애로운 모습, 천진난만하게 묘사된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에 막연한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Mendut 사원의 Hariti 조각


이야기를 해석해 보자면 하리티는 원래 천연두와 같은 역병의 신이라고 볼 수 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은 여러 질병으로 성인이 되기 이전에 죽기 십상이었는데, 이를 역신 하리티가 데려갔다고 묘사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외에도 하리티에 대한 몇 가지 관련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리티가 불교에 귀의한 이후, 사람고기를 먹고 싶어서 힘들어하자 붓다가 석류를 먹으라고 하여 석류가 자주 묘사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석류는 많은 알맹이가 들어 있어서 동아시아에서도 다산의 상징으로 널리 쓰이고 있었는데, 식인귀였던 점지신이 식인을 참기 위해 먹는 과일이 다산을 상징하는 석류라는 점이 공교롭게 느껴졌다. 또한 과거의 잘못을 반성을 하기 위해서 500개의 망고를 보시하였다는데,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하리티 조각에 배경으로 망고나무가 묘사되어 있는 이유이다. 망고도 주렁주렁 열려있는 탐스러운 모습이 다산과 관련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흘렀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박물관에서 하리티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간다라의 하리티는 돋아난 송곳니를 비롯해, 얼굴 표정에 이르기까지 인도네시아에서 봤던 자애로운 모습보다는 야차의 사나운 모습이 더 많이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배경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기에 반가웠다. 이 기회에 하리티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하리티에 대한 조각 사례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은 간다라 지역이며, 이야기의 근원은 간다라 혹은 인도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Shahri Bahlol 출토 하리티상, 페샤와르 박물관

 

하리티 신앙은 대승불교가 확산된 경로를 따라 대부분의 나라에서 받아들여졌다. 간다라와 서역, 중국 전역을 넘어 일본에서까지 널리 확인된다. 아마도 하리티의 이야기에 담긴 악신 혹은 역신이 오히려 아이들을 지키는 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부모들의 마음속에 녹아들기가 쉬웠을 것이다. 실제로 절의 한 편에 하리티에게 기도하기 위한 부분을 대부분의 사찰에 마련해두었다고 한다.


중국의 귀자모신 사례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크게 인기를 못 얻었을까? 한국의 점지신으로 삼신할미가 있는데, 이 삼신할미가 하리티와 같은 것일까? 그래서 한국의 삼신할미 이야기에 대해서 좀 찾아보았다.


동해용왕이 서해용왕의 딸과 결혼을 하였는데, 힘들게 딸을 얻었다. 동해용왕은 힘들에 얻은 딸을 너무 오냐오냐 키워, 용궁의 말썽꾸러기로 자라났다. 하지만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켜 용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인간세상에 나가서 생불왕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을 너무 대충 배워서 점지는 하였으나 출산을 하지 못하였다.

동해용왕의 딸이 생불왕의 일을 못하자 사람들은 옥황상제에게 요청을 했다. 옥황상제는 덕이 높기로 소문난 명진국의 딸에게 생불왕을 하도록 명했다. 이에 일이 겹치게 된 두 명의 생불왕이 싸우게 되었다. 옥황상제는 두 명에게 누가 꽃을 잘 피우는지로 생불왕을 결정짓는 시합을 시켰다. 결국 명진국의 딸이 압도적으로 꽃을 잘 피웠다. 이에 명진국의 딸리 삼신할미가 되었고, 동해용왕의 딸은 저승할망이 되었다.

<삼신할미 이야기 요약>



삼신할미는 옥황상제가 지정한 신으로, '아이를 점지하는 신'인 점은 하리티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여러 면에서 차이점이 보인다. 특히 하리티가 식인귀였다가 불교에 귀의한 점과 삼신할미가 애초부터 덕이 많았던 명진국의 딸이라는 점은 대척점에 있다. 삼신할미 신앙이 제주도에서 특히 활발했던 신앙으로 외래신앙이기보다 한국에서 발생한 자체 신앙일 가능성이 높다고도 말해진다. 아마도 한국에 하리티 신앙이 들어왔을 때, 이미 기존에 있던 점지신 신앙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불교가 받아들여지는 와중에도 점지신 부분은 별로 인기를 못 얻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세계가 열광했던 하리티 문화에도 지지 않았던 우리나라의 삼신할미 신앙이 요즘 사뭇 시들해진 듯하다. 이는 급격하게 줄어든 출산율에 대한 영향인지, 아니면 삼신할미에 대한 신앙이 줄어서 삼신할미가 점지를 안 해줘 출산율이 줄었는지는 모르겠다. 글에서 출산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삼신할미가 앞으로도 꾸준히 사랑받아, 다른 문화권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하리티처럼 계속 전승되기를 바란다.


남편인 재보의 신 쿠베라와 함께 있는 하리티(페샤와르 박물관)




참고자료

Mengjie Shi, 'From deity to demon: the rise and fall of Hārītī worship in China',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Communications 11(1)", 2024.1

Julie Bellemare, 'Hariti Domesticated: Re-evaluating Structures of Patronage in Gandharan Art', "Orientations", 45-7, 2014

조승미, '불교의 모신(母神) 하리티(Hārītī) 신앙의 형성과 변천 연구', "불교연구 41호", 2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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