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4년, 현장법사는 귀국을 결심했다. 중국을 떠나오기 전에 장안에서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서 점을 봤던 것 처럼 인도에서도 일부러 용한 점쟁이를 찾았다.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한 '벌사라(伐闍羅:Vajra)'라는 니건자(尼乾子)에게 점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 대목이 참으로 흥미롭다. 그렇게 오랫동안 불교를 공부하였고, 또 똑똑하기로 유명한 학승이었음에도 점보는 것을 좋아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니건자(尼乾子)라고 하면 알몸으로 생활하는 자이나교도이다. 기록을 보면 대승과 소승 사이에서도 서로 꺼려하는 분위기였던 듯 한데, 굳이 자이나교도를 찾아가 점을 본 것을 보면, 인도로 오던 길에 겪었던 위험과 고생이 다시 떠올라 진심으로 우려되었던 듯 하다. 개인적으로 현장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져서 호감이 가는 부분이다.
니건자의 점괘는 '중국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이며, 돌아가서도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인도에 남는다면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인도에 남으면 더 큰 성공이 있을 것이라는 점괘에도 현장은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스승인 계현 법사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현장의 귀국을 만류했다. 당시 인도는 중국보다 발전한 나라였고, 승려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훨씬 좋았기에 불교를 공부하기에 훨씬 좋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렵게 천축국까지 온 구법승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또한 현장은 이미 현지어도 원어민 수준으로 하고, 지인들도 많이 생긴 뒤였다. 십수년의 새월을 이미 인도에서 보낸 뒤였기에 고국보다 인도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을 법하다. 그럼에도 현장은 귀국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다.
왕들의 귀에 들어 간 현장의 귀국 소식
현장이 귀국을 한다는 소문이 돌자 전부터 현장을 한번 만나 보았으면 했던 왕들의 마음이 급해졌다. 먼저 구마라왕(Bhāskara-varman)이 계현법사에게 연락을 넣어 현장을 보내주길 여러차례 요청을 했다. 계현법사가 현장이 귀국해야 한다는 이유로 계속 거절하자, 구마라왕은 날란다 대승원을 쓸어버리겠다고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어쩔 수 없이 현장은 구마라왕을 만나러 갔다. 현장을 만난 구마라왕은 지극정성으로 대접하였고, 현장은 한 달동안 설법을 하였다.
한편, 현장이 구마라왕에게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계일왕(Harshavardhana)은 자기가 현장을 초청했을 때는 오지 않더니 구마라왕에게 가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당시 인도에서 가장 강한 대왕이었던 계일왕은 구마라왕에게 당장 현장을 보내라고 하였다. 하지만 구마라왕은 내 머리를 내 놓을지언정 현장법사는 보내지 않겠다며 버텼다. 화가난 계일왕은 직접 구마라왕의 거처로 행차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현장의 기록이 보이는데, 계일왕이 한 걸을 내딧을 때마다 시종이 북을 한 번씩 쳤다고한다. 이를 '절보고(節步鼓)'라고 하는데, 계일왕을 제외한 다른 왕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계일왕의 위상이 사뭇 짐작간다.
구마라왕을 만난 계일왕은 구마라왕을 용서하는 대신 현장과 구마라왕을 자신의 궁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현장을 논주(論主)로 한 '무차대회'를 열었다. 현장이 집필한 '제악견론(制惡見論)'을 논파하는 것이 이번 무차대회의 주제였다. 날란다 승원의 명현 법사가 제악견론을 읽어 사람들이 듣게 하였고, 또 법회장 밖에 필사본을 걸어두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많은 논사들이 덤벼들었음에도 18일 동안 그 누구도 제악견론의 허점을 찾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무차대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에 현장을 더러 대승쪽에서는 ‘대승천(大乘天)’이라는 칭호를, 소승쪽에서는 ‘해탈천(解脫天)’이라는 칭호로 불리게되었다. 현장의 명성이 더욱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현장의 활약에 만족한 계일왕은 현장법사를 돌아가지 못하도록 붙잡았지만 현장은 완고했다. 포기한 계일왕은 현장에게 바닷길로 돌아 간다면 사람을 시켜 보내드리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현장은 고창국의 왕과의 약속이 있어 육로로 가겠다고 하였다. 바닷길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육로는 몸이 훨씬 고단한데, 이를 감내하고 고창국의 국왕과 약속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 시점에 고창국은 멸망한 뒤였다. 계일왕은 아쉬운 마음으로 현장을 놓아주었다. 대신 타고 갈 코끼리를 비롯하여 노잣돈을 두둑하게 들려보냈다.
인도에서 귀국 중인 현장 스님(둔황 103굴) ⓒ Wikipedia
쉽지 않은 귀국길
현장은 북서쪽 방향으로 간다라를 거쳐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탁실라에서 일주일간 쉰 다음에 인더스 강을 건넜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강의 거쌘 물살에 배가 기울어져 경전을 운반하던 사람이 물에 빠졌다. 이로 인해서 50권의 패엽경과 과일씨, 꽃씨 등이 강에 휩쓸려 내려갔다. 강 건너에 마중나와있던 카피시의 왕이 예로부터 인도의 씨앗을 가지고 건너려고 하면 이런 사고가 생긴다고 말했다. 현장은 사람을 시켜 잃어버린 경전들을 다시 베껴오도록 하고, 인근의 절에서 50일 정도 머물면서 기다렸다.
계일왕이 준 코끼리는 상당히 쓸만했다. 경전이나 짐들을 옮기는데도 좋았고, 인더스 강을 건널때도 현장은 코끼리를 타고 건넜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산적 때를 보고 놀란 코끼리가 물에 빠져죽었다. 그런데 현장은 인도로 올 때에도 중국으로 돌아 갈 때에도 여러차례 산적들과 조우했는데, 어떻게 모든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했는지가 상당히 미스테리다.
현장은 설산과 사막을 건너며 길을 제촉했다. 그러나 정작 당나라가 인접해오자 현장은 불법 출국했던 일에 대한 우려가 생기기 시작한 듯 하다. 그래서 타클라마칸 사막 남서쪽에 위치한 우전국(코탄)에 이르렀을 때, 당태종에게 표문을 보내고 답신을 기다렸다. 내용인 즉, 자신은 불법을 찾기위해 비록 국법을 어기고 출국을 했지만, 17년간 많은 성과를 얻어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당태종으로부터 받은 답신은 지극히 환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