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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희 Sep 21. 2024

현장법사(6) - 완벽한 마무리

간다라 이야기 #38

645년 1월,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의 주작대로에 사람들이 몰렸다. 현장법사가 먼 천축국에서 가져온 다량의 불상들과 불경들이 전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전부터 중국에서 알음알음 전해지던 불교가 당나라에 들어 사회적 호기심이 극도에 달했던 만큼, 본토에서 온 불상들과 불경들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나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렸던지 당시 도성의 관리 압사 사건을 우려해 사람들에게 움직이지 말고 각자의 자리에서 향을 피우도록 하여 군중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당나라 시대의 장안성 지도 ⓒ wiki


如來肉舍利一百五十粒;摩揭陁國前正覺山龍窟留影金佛像一軀,通光座高三尺三寸;擬婆羅痆斯國鹿野苑初轉法輪像,刻檀佛像一軀通,光座高三尺五寸;擬憍賞彌國出愛王思慕如來刻檀寫眞像,刻檀佛像一軀,通光座高二尺九寸;擬劫比他國如來自天宮下降寶階像,銀佛像一軀,通光座高四尺;擬摩揭陁國鷲峯山說『法花』等經像,金佛像一軀,通光座高三尺五寸;擬那揭羅曷國伏毒龍所留影像,刻檀佛像一軀,通光座高尺有五寸;擬吠舍釐國巡城行化,刻檀像等。又安置法師於西域所得大乘經二百二十四部,大乘論一百九十二部,上座部經、律、論一十五部大衆部經律論一十五部三彌底部、經、律論一十五部,彌沙塞部經、律、論二十二部,迦葉臂耶部經、律、論一十七部,法密部經、律、論四十二部,說一切有部經、律、論六十七部,因論三十六部,聲論一十三部。凡五百二十夾,六百五十七部,以二十疋馬負而至。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卷第六


여래의 육사리 150개, 마갈타국 전정각산의 용굴유영 금불상 1구(3척 3촌), 바라나시국 녹야원의 초전법륜상 모조 단나무 불상 1구(3척 5촌), 교상미국 출애왕이 여래를 사모하여 단나무에 조각한 불상 모조상 1구(2척 9촌), 여래가 도솔천에서 보계를 밟고 내려오는 모습을 모조한 은불상 1구(4척), 마갈타국 취봉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모습의 금불상 1구(3척 5촌), 나게나갈국에서 독룡을 굴복시킨 모습을 조각한 단나무 불상 1구(5척), 폐샤리국에서 성을 돌며 행화를 하는 장면을 본단 단나무 조각 1구 등. 대승경 224부, 대승론 192부, 상좌부 경률론 15부, 대중부 경률론 15부, 대중부 경률론 15부, 삼미저부 경률론 15부, 미사색부 경률론 22부, 가섭비야부 경률론 17부, 법밀부 경률론 42부, 설일체유부 경률론 67부, 인론 36부, 성론 13부 까지, 무려 520협 657부나 되었는데, 이것들은 20 필의 말에 실어서 가지고 왔다.
 
-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권 6



이는 현장이 귀국길에 가져온 불상과 불경들의 목록이다. 홀홀 단신으로 떠난 구법승이 가져왔다고 보기에는 놀라운 수량이다. 물론 이 짐들을 혼자 가져온 것은 아니다. 계일왕(Harshavardhana)이 마련해 준 코끼리가 도적 때를 만나 놀라 물에 빠져 죽는 바람에 짐들을 말과 사람들에게 나눠 싣고 오면서 고생을 하긴 했지만 무사히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당태종, 현장에게 반하다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앞에 둔 중요한 시기였음에도 서역을 거쳐 천축을 다녀왔다는 승려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겼던 모양인지 직접 현장을 만났다. 황제를 만난 현장은 특유의 청산유수와 같은 말솜씨를 부리며 재차 불법 출국한 점에 대해 용서를 이끌어냈다. 당태종은 출가한 승려는 속인과 달라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며 정중하게 예우했다. 그리고 점점 현장이 풀어내는 여행기에 빠져들어갔다. 이야기가 재밌었던지 전쟁 준비는 잊고 하루 꼬박 현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부족하였는지 태종은 전쟁 길에 동행해 달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현장은 귀국길에 병을 얻었다는 이유와 승려는 전쟁의 참상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율을 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혹시 이때 현장이 당태종의 제안을 승낙했다면 우리 입장에서 좀 더 재밌는 상황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의 서유기에 삼장법사가 서역으로 가는 이야기만 나온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제안을 승낙했었더라면 고구려를 정벌하는 황제를 보필하기 위해 동쪽으로 갔을 것이고, 주인공인 손오공은 또 다른 우마왕급 빌런인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싸우는 모습 그려졌을 것이다. 역사에 만일은 없다지만, 그럴 법도 한 것이 당태종과 싸운 연개소문은 무신으로 그려지며 이들의 싸움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인기 있던 주제였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현장법사가 고구려에 올 인연은 없었던 모양이다. 


황제의 청을 거절한 현장은 천축에서 가져온 경전들을 번역하게 해 달라는 청을 올렸다. 황제는 자신의 어머니 목태후를 위해 건립한 홍복사에서 번역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또한 번역에 필요한 인적 물적 지원도 약속했다.


현장법사 동상과 자은사 대안탑 ⓒ flickr



경전의 번역과 대당서역기를 집필하다


황제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낸 현장 역경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 당시 나라에서 가장 유능한 승려 12명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번역팀을 구성하였는데, 구성이 아주 놀랍다. 구성은 아래와 같았다.


- 역주(譯註): 역장의 최고 책임자로서 산스크리트와 중국어에 정통하고, 불교 교리에도 조예가 깊어 번역작업의 제반 문제에 대해 판단함.
- 증의(證義): 역주의 조소로서 번역문의 의미를 상세히 검토함.
- 증문(證文): 문장을 올바르게 다듬음.
- 서자(書字): 중문이 올바른지 살핌.
- 필수(筆受): 산스크리트본을 한문으로 옮길 때 받아 적음.
- 철문(綴文): 필수의 기록을 정리하여 중국어 언어습관에 부합하도록 바꿈.
- 참역(參譯): 번역된 중국어 문장을 다시 산스크리트로 번역해서 대조하고 정확성을 검사함.
- 간정(刊定): 불필요한 문장을 삭제하고, 늘려야 할 곳은 늘려서 문장의 의미를 확정함.
- 윤문(潤文): 번역문의 문장을 수사학적인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다듬음.
- 범패(梵唄): 번역문의 문장을 창하고, 낭송을 반복하여 독송하기 적절하게 만듦.
- 감호대사(監護大使): 황제의 명을 받은 대신이 불전 번역의 모든 과정을 감독하고 보호함.

<조윤경, 2019>


현장의 번역팀은 645년부터 현장이 입적하는 664년까지 놀라운 성과를 내었다. 처음 6년간은 유가사지론, 현양론, 불지론, 섭대승론을 번역했다. 그다음 10년간은 구사론, 발지론, 비바사론, 육족론, 순정리, 현종을 번역했다. 마지막 4년간은 대반야경을 번역했다. 총 1,335권으로 역경승으로 유명했던 구마라집이 평생 300권을 번역했음에 비하면 거의 4.5배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번역한 분량으로도 놀라웠지만 번역의 질도 매우 높다고 평가받는다. 그 이유는 현장은 ‘오불번(五不翻)’과 같이 번역의 원칙을 명확히 세우고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오불번이란 아래와 같은 경우 번역하지 않고 음역을 하는 것이다.


1) 생선고불번(生善故不翻): 뛰어난 작용을 일으키는 용어
2) 비밀불번(秘密不翻): 비밀스러운 다라
3) 함다의고불번(含多義故不翻):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용어
4) 순고불번(順古不翻): 예로부터 음역 했던 용어
5) 무고불번(無故不翻): 중국에 존재하지 않는 것


대당서역기 ⓒ Public Domain(Wikipedia)


현장법사가 이룩한 성과도 대단하지만, 그의 인생이 높게 평가받을 수 있게 된 중요한 이유는 상세한 기록이 동반되어서일 것이다. 현장은 당태종의 요청에 응하여 '대당서역기'를 집필했다. 대당서역기는 627년 출발로부터 645년 귀국에 이르는 기간 동안 보고 들었던 110개국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아무래도 황실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만큼 기록의 객관성이 높으며, 내용의 완성도도 높다. 이러한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현장의 뛰어난 능력은 물론, 당시 세계로 확장하던 당나라에게 필요했던, 시의성이 높은 내용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인도에서 본 큰 기러기 탑을 짓다


652년 한참 번역 작업을 진행하던 현장은 혹시라도 재앙이 닥쳐 자신이 가져온 경전들이 불에 탈 것이 우려되었다. 그래서 황제(고종)에게 부탁하여 경전들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탑을 지을 수 있도록 요청했다. 원래의 계획은 인도에서 보고 온 탑과 같은 형태로, 재료도 돌로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기술적, 재정적 문제로 돌 대신 벽돌을 사용하기로 했다. 기록에는 현장법사가 직접 삼태기를 지고 벽돌을 날랐다고 한다. 이 탑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탑은 완성되었다. 높이가 140척(47m)이며, 상륜까지 하면 180척(60m)에 달했다. 탑의 형태는 기존의 중국 탑과는 사뭇 다른 형태였다. 지금의 중국 장안의 대자은사에 있는 대안탑(大雁塔)은 704년 측천무후가 붕괴된 대안탑을 재건한 것이라 한다. 그래도 원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측천무후는 불교 부흥에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고, 또 현장이 대안탑을 처음 건립한 무렵 이를 직접 보았을 것이기에 복원했다고 하더라도 원래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현장법사 입적하다


현장법사는 천축에서 돌아온 이후로 19년간 쉬지 않고 역경 작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664년 1월 1일, 더 이상 역경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죽을 때가 임박하여 더 이상 번역을 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경치 좋은 산 골짜기로 가서 기도를 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아마도 현장 스스로 이제 수명이 다 해 가는 것을 각한 듯하였다. 1월 23일,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을 모아달라고 하여 하나하나 작별 인사를 나눴다. 2월 5일, 미륵보살이 있는 도솔천에서 환생할 것이라고 말을 남기고 62세의 나이에 입적에 들었다.


현장법사의 일대기를 돌이켜 보면 세 시기로 구분이 된다. 첫 번째는 출가 후 일반 승려로서의 기간으로 10살부터 25살(627년)까지의 15년간이다. 이미 이 기간 동안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춘 뒤였다. 두 번째는 43세(645년)까지로 18년간의 구법여행 기간이었다. 인도의 주요 불교 성지들을 직접 둘러보았으며, 날란다 대학에서 당대 최고의 학승의 반열에 올랐다. 마지막은 귀국 후에서 입적에 들기까지로 19년간의 역경과 집필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은 황제의 지원을 받으며 1,335권의 경전을 번역했으며, 대당서역기를 남겼다.  


현장법사는 여러모로 놀라운 업적을 남긴 위인이다. '대자은사삼장법사전'을 집필한 혜립은 현장의 입적 부분에서 현장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글로 쓰인 문구만으로 그의 모습을 그려내기는 쉽지 않지만, 청정하고 무게감 있는 그리고 존경스러운 어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법사의 키는 7척 남짓하고 몸은 붉은빛을 띤 하얀색이었으며 눈과 눈썹이 뚜렷했다.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은 마치 조각상 같았고 아름답고 우아하기가 꼭 그림 같았다. 음성은 맑게 멀리 퍼졌으며 말투는 우아하고 청아하여 듣는 사람이 싫증을 내지 않았다. 혹 대중 속에 있거나 손님을 대할 때에는 반나절을 줄곧 앉아 있어도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복장은 늘 가사를 입고 있었는데, 꼭 세모시로 만들어 입었다. 걸어가는 모습은 유유자적했으며 항상 똑바로 보고 곁눈질하지 않았다. 도도한 모습은 마치 큰 강이 대지 위를 흐르는 것 같고, 환한 모습은 연꽃이 물 위에 피어난 것 같았다. 거기에다 시종일관 계율로써 단정하고 깨끗한 모범을 보였으며,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계율을 보호하는 이상이며 계를 지키는 견고함은 계초를 뛰어넘었다. 성품은 간명하고 온화함을 좋아했으며 사람 사귀고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 도량에 들어가면 조정의 명이 아니면 외출하지 않았다.  



참고자료


현장 저, 권덕주 역, "대당서역기", 올재, 2012

혜립 저, 김영률 역,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동국대학교한글대장경 [link]

신소연, 김민구 역, 샐리 하비 리긴스 저, "현장법사", 민음사, 2010

조윤경, '현장의 불전 번역 원칙 : 도안 및 구마라집의 번역과 비교하여', "불교와 사회", 11(2), 2019, pp.1-26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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