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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희 2시간전

신라 스님 '혜초'가 본 간다라

간다라 이야기 # 45


천년의 타임캡슐 '둔황문서'


1900년 6월 22일, 중국의 간쑤성 둔황시에서 타임캡슐이 개봉되었다. 수 백개의 굴들로 이루어진 막고굴의 어느 한 방의 벽에서 흙으로 밀봉되어 숨겨져 있던 새로운 방이 발견되었다. 숨겨져 있던 방 안에서 4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작성된 고문헌 5만 점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잊혀 있던 신라의 고승 혜초의 역사도 함께 나왔다.


(좌) 돈황문서가 보관된 장경동(17굴) (Charles Nouette, 1908), (우) 16굴에서 이어진 17굴(사진 우측 끝단) (Aurel Stein, 1907)


왕위안루(王圓籙)는 태청궁의 도사로 막고굴에 살면서 굴을 관리하며 살고 있었다. 그는 여느 날처럼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담배 연기가 어느 벽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담뱃대로 두들겨 봤더니 다른 벽과 달리 공명하는 것을 확인했다. 뒤에 공간이 있음을 확신하고 흙 벽을 부숴 내부를 확인한 결과 오만여 점의 두루마리 고문서가 발견되었다. 이후 이 '둔황문서'고 불린다.


왕위안루는 즉시 이 발견을 청나라 지방 정부에 보고하였다. 하지만 어수선했던 청나라 말기의 상황으로 관심을 가지는 관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05년에 러시아의 지질학자 오브루체프가 두 보따리 분량의 둔황문서를 가져갔다. 이어, 1907년 영국인 탐험가 아우렐 스타인(Aurel Stein)이 왕위안루를 꽤어 고문헌과 회화, 공예품 등을 25 상자를 헐값에 구매해 런던으로 반출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프랑스인 교수 폴 펠리오(Paul Pelliot)도 1908년에 막고굴을 찾아와 사경, 회화, 직물류를 29 상자를 구매해서 파리로 반출했다. 외국의 학자들은 둔황문서를 하나하나 해독해 나갔다. 특히 한자를 해독할 수 있었던 펠리오는 구매한 고문서 중에 유실된 줄 알았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있음을 확인하고 세상에 알렸다. 둔황문서의 가치가 알려진 이후 중국정부는 이를 보존하고자 하였지만, 이미 대부분이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왕오천축국전 ⓒ public domain



신라 스님 '혜초'


'말 목 자른 김유신 통일 문무왕 원효 대사 해골물 혜초 천축국♪'


우리는 천축국을 다녀온 '혜초' 존재에 대해서 많이들 알고 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에서도 그 이름이 담겨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혜초스님의 인생이나 업적은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왕오천축국전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것도 1908년의 일로 비교적 근례의 일이었으며, 혜초스님이 신라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진 것도 이로부터 7년 뒤인 1915년의 일이었다. 이 또한 일본인 학자가 밝혔다. 일본인 불교학자 타카쿠스 준지로(高楠 順次郎)는 불공삼장의 유서를 살펴보다가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가 신라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밀교의 비법을 전해 여러 명의 제자를 두었다. 오부의 율법을 닦아 일가를 이룬 제자가 여덟 명이 된다. 둘은 입적하였고 여섯이 남아있는데 금각사의 함광과 신라의 혜초, 청룡사의 혜과, 숭복사의 혜랑 보수사의 원교와 각초이다."
- 불공삼장의 유서 중에서


이전에 혜초에 대해서는 당나라의 고승 불공의 두 번째 제자라는 정도의 대략적인 정보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왕오천축국전의 등장 이후로 유명세가 더하면서 혜초와 관련된 정보가 조금씩 취합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혜초의 일대기는 다음과 같다.


혜초의 일대기

719년 신라의 고승 '혜초(慧超/惠超 704-787)'는 열여섯 살의 나이에 고국을 떠나 당나라로 갔다. 720년 인도에서 온 밀교 고승 '금강지'를 만나 불교를 배웠다. 금강지의 권유를 받은 혜초는 723년,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천축국으로 구법여행을 떠났다. 해로를 통해 동천축으로 들어가 중천축,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을 거쳐 카슈미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역을 지나는 육로로 당나라 장안으로 돌아왔다. 약 4년에 걸친 여정이었다. 733년, 혜초는 다시 스승인 금강지를 모시고 밀교를 배우면서 역경을 작업에 몰두했다. 741년 금강지가 입적하자 금강지의 제자였던 '불공'을 새로운 스승으로 모시고 역경작업을 계속했다. 774년 불공이 입적한 이후에는 오대산에 입산하였고, 787년, 중국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84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혜초의 일대기는 단편적인 정보들만 남아 있지만, 그가 당나라 불교계에서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았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혜초는 중국 밀교의 초조라 불리는 금강지와, 중국 밀교를 완성시킨 불공의 수제자로서 밀교에 대해 평생을 공부했다. 특히 불공은 2천 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혜초가 그 모두에서 두 번째 제자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역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젊은 시절 혜초는 황실의 원찰인 내도장에서 나라를 위한 축원과 기우제를 수행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론 당나라가 외국인에게 비교적 관대한 사회였다고는 하나, 어린 나이에 신라에서 홀로 건너와 바닥부터 시작해 중국 밀교에서 핵심인물로 인정받은 점에서 그의 의지와 노력이 대단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혜초는 이러한 업적과 위상을 유지하며 80세를 넘게 '장수'하며 당나라 불교계에서 굳건한 입지를 유지했음이 주목할 부분이다. 신라의 승려 혜초가 그 시대의 당나라 불교계에서 얼마나 대단한 위상을 떨쳤음을 생각해 보면 한국인 유학생 출신으로 사뭇 존경스럽다.



혜초가 본 천축국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을 살펴보자. 펠리오가 발견한 왕오천축국전은 앞부분이 소실된 버전이다. 전체가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제2권과 제3권에 해당하는 부분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혜초가 중국에서 출발해서 인도로 온 여정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아마도 중국에서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를 거쳐 동인도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인도의 바이샬리에서 나체의 자이나교도들을 본 짧은 기록부터 작한다. 이어 쿠시나가라로 이동하여 부처님이 열반 한 곳을 방문한다. 성은 이미 황폐해져 있었지만 부처님이 열반에 든 곳에 세워진 탑을 청소하는 한 선사를 봤다고 한다. 그리고 초전법륜지인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아소카의 석주를 보고 감탄한다. 이렇게 혜초의 기록은 직접 보고 경험한 것에 대해서 비교적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다.


여정은 중천축,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으로 인도의 다섯 천축을 둘러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혜초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관점으로 축을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천축에는 도적들이 많지만 물건만 빼앗고 곧 놓아준다고 기록한다. 현장이 그렇게 많은 도적들을 만나고도 살아났던 배경을 알게 된 듯하여 흥미롭다. 그 외에도 사람들의 풍습이나 인품, 송사나 형벌 등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다만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호의적인 묘사가 이어진다. 혜초의 성격이 드러나는 듯하다.


또 한편으로 흥미로운 묘사는 군사력에 대한 표현이다. 칸나우지에 살고 있는 중천축의 왕은 주변 4 천축국과 싸워서 항상 이겼다고 한다. 중천축국의 왕은 900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보다 적은 코끼리를 가진 주변국들의 왕들은 스스로 약한 줄 알고 화친을 청하여 해마다 세금을 바치고 싸우지 않으려 했다 한다. 이 코끼리 보유수에 대한 묘사는 천축국들의 기록 곳곳에서 이어진다. 남천축국의 왕은 코끼리 800마리를 보유하고 있으며, 서천축은 500~600마리, 북천축은 300마리를 보유하고 있다. 군인의 수가 아니라 코끼리 수가 군사력의 기준이 되는 듯하여 흥미롭다.


천축을 나가서는 간다라, 바미얀,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서역을 지나 중국으로 돌아다. 현장의 기록보다는 단순하지만 각국의 지리환경에 대한 특징이나 산물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불교 승려답게 그 나라에 절이나 승려가 있는지, 왕과 백성들이 불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꼭 명시하고 있다.



혜초가 본 간다라


혜초가 다녀간 간다라 지역에 대해서 주목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혜초는 천축국에서 나와 카슈미르, 길깃 발티스탄, 페샤와르, 우디야나, 잘랄라바드, 카피샤, 바미얀의 동선으로 여행을 이어나갔다. 나라에 따라서 길게 혹은 간략하게 묘사를 남겼는데, 그중에서 다소 길게 묘사를 남긴 카슈미르, 페샤와르, 카피사에 대해서 살펴본다.


1) 카슈미르에 대해서는 북천축국에 속하고 있지만 다른 오천축국과는 기후가 전혀 다름을 기록다. 혜초가 방문했을 당시 카슈미르는 여전히 불교가 융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왕부터 왕실의 유력자들이 각자 별도로 축원하여 절을 짓는다고 한다. 왕족들도 부자들도 자유롭게 보시를 다. 백성들도 삼보를 대단히 공경한다고 하였다. 특히 인상적인 기록은 나라 안에 용지가 있어 그 연못의 용왕이 매일 1천 명의 나한승들을 공양한다고 하였다. 100년 전 이 지역을 방문했던 현장 스님도 이 지역에서 전해지는 용왕 설화를 기록했었다.


2)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간다라 지방을 다스리는 왕들은 돌궐인이라 하였다. 돌궐 왕은 코끼리 다섯 마리가 있고 양과 말, 낙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천축의 나라들과는 다른 점이다. 왕은 비록 돌궐족이지만 삼보를 공경하고 신봉다. 왕은 해마다 무차대재를 두 번씩 열고, 처와 코끼리까지 가진 것들을 모두 시주한다. 다만 처와 코끼리는 승려에게 값을 매기게 하여 되사온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공양한다. 성의 서쪽에 큰 절이 있는데 절의 이름은 카니슈카이다. 절에는 하나의 큰 탑이 있는데 옛날의 카니슈카 왕이 만든 것이다. 또한 성 동남쪽에는 붓다가 시비왕이었던 시절 비둘기를 살렸던 곳이 있다.


3) 카피샤의 왕은 여름에는 여기에, 겨울에는 간다라국에서 지낸다. 사람들은 삼보를 공경하여 신봉하고, 절도 많고 승려도 많다. 백성들 집에 각각 절을 만들어 삼보를 공양한다. 큰 성 안에는 사사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절 안에 부처의 머리카락과 뼈와 사리가 보관되어 있다. 현장이 이야기했던 부처의 정골과 같은 이야기인 듯하다.


혜초의 여행동선



떠돌이 인생의 외로움


왕오천축국전에는 몇몇 흥미로운 오언시(다섯 글자로 반복되는 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혜초가 여행 중 느낀 감상을 시로 푼 것이다. 그중 하나의 시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月夜瞻鄕路 달밤에 고향 길 바라보니

浮雲颯颯歸 뜬 구름만 흩날리며 돌아가고 있네

減書參去便 편지라도 써서 구름 편에 부치고 싶건만

風急不聽廻 바람이 급해 구름은 돌아보지도 않는구나

我國天岸北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는데

他邦地角西 남의 나라 땅 서쪽 모퉁이에 와 그리워하네

日南無有雁 더운 남쪽 천축은 기러기도 없으니

誰爲向林飛 누가 고향의 숲을 향해 날아가려나


이 시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담겨있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사 년째 세상을 떠돌다가 먼 천축국까지 왔으니, 그 마음에 깊은 공감이 간다. 아직 스무 살이었으니 어린 마음에 고향이 어찌 안 그리웠으랴. 다만 안타깝게도 84살에 입적할 때까지 혜초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이 글을 쓰면서 '과연 혜초스님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가지고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었다. 그 마음을 알 길은 없지만, 여러모로 생각해 본 결과,  '왕오천축국전에 담긴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감수성 풍부한 사람이라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참고자료

김규현, "왕오천축국전", 글로벌콘텐츠, 2014

Jacob Mikanowski, 'A Secret Library, Digitally Excavated', The New Yorker, 2013. 10. 9.

지안, "왕오천축국전", 불광출판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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