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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희 Nov 02. 2024

한 순간에 재가 되어버린 간다라

간다라 이야기 #44

그토록 융성했던 간다라의 불교는 어떻게 망했을까? 이를 알 수 있는 실마리는 승원이나 스투파 유적의 토층에 선명하게 남겨져 있다. 회반죽 조각의 모서리 틈이나 폐허가 된 유적의 바닥을 잘 긁어보면 검은색 탄화층이 드러난다. 곳곳에서 불 맞은 돌도 보인다. 화재의 흔적이다. 화재의 흔적은 많은 불교 유적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관찰된다. 그리고 그 화재층을 마지막으로 생활의 흔적이 거의 없다. 극도로 발전했던 불교 사원들이 일시에 모두 불태워졌고, 재건되지 못한 것이다.


자울리안 사원 벽함 회반죽 조각상 틈사이에서 보이는 탄화층
Jinnan Wali Dheli 사원에서 보이는 불 맞은 바닥돌


간다라의 멸망 혹은 쇄락 단정 짓기는 사료가 불충분하여 어려운 점이 많다. 다만 영국계 학자들은 간다라의 멸망이 에프탈(Hephthalites) 혹은 백훈족(White Huns)이라 불리는 유목민들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해 왔다. 아직도 이 의견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훈족은 4세기를 전후로 중앙아시아에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일대를 휩쓸었던 유목민족이다. 특히 4~6세기 유럽의 역사를 흔들었던 '게르만족의 이동'을 야기시킨 역사가 명하다. 그래서 훈족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폭력적인 야만인에 가깝다.


훈의 왕이 조각된 동전 상세, 아프로시압 박물관의 훈족의 두개골 ⓒ Wikipedia (public domain)


훈족은 편두를 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편두란 유아기, 두개골이 굳기 이전 혹은 성장하는 단계에서 머리에 천을 감거나 돌을 올리는 방법으로 머리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사실 필자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박물관에서 편두를 한 훈족들의 유골을 여러 차례 실견할 기회가 있었다. 특이한 형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다른 시기의 유물들을 집중하다 보니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글을 정리하면서 당시 사마르칸트의 편두 두개골이 훈족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훈족이 당시 얼마나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었는지를 재인식할 수 있어 스스로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로 다가왔다. 분명 편두의 두개골이 주는 강인하고 공포스러운 이미지는 아마도 필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으로 각인되지 않았을까 싶다.


편두를 한 훈족의 두개골(사마르칸트 박물관)


간다라를 침략한 훈족에 대해서 엄밀하게 말해, 훈족의 한 일파인 '알콘 훈(Alchon Huns)'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알콘 훈은 에프탈과는 별도의 세력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에프탈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힌두쿠시 산맥 너머로는 알콘 훈의 영역이었다는 의견, 그리고 간다라의 탄화층 위에서 확인되는 것이 알콘 훈의 왕들이 새겨진 동전이 주류라는 점 등의 이유로 간다라를 불태운 것은 '알콘 훈'이라는 것이다. 아직 불명확한 부분이 많지만 후자의 의견이 타당해 보인다.


알콘 훈의 동전(미히라쿨라 왕) ⓒ wikipedia(CC 3.0)


역사서에서는 간다라에 재앙을 불러온 인물로 알콘 훈의 왕 '미히라쿨라(Mihirakula, 재위: 515-540)' 거론된다. 그에 대한 기록은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 등장한다.


미히라쿨라는 샤칼라 고성을 본거지로 하여 모든 인도를 정벌하여 다섯 인도의 왕이 되었다. 재주와 슬기가 있고, 성질이 용감하여 복종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다. 정무의 여가에 불교를 배우고자 하여 승려 중 지덕을 갖춘 자를 추천받고자 하였지만, 모두가 왕을 두려워하여 응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마침 왕가에 동복으로 출가하여 논리를 아는 자가 있어 승려들은 왕에게 이를 천거하였다. 이에 왕은 "나는 불교를 존경하여 멀리까지 명승을 구했는데 승려들은 이런 심부름꾼을 천거하여 나와 더불어 이야기하게 했다. 나는 항상 승려 가운데는 현명한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많으리라고 생각해 왔다. 이제 와서 분명히 알았다. 어떻게 불법을 존경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불교에 관계되는 것을 모조리 파괴하고 승도는 모두 내쫓아 버리도록 했다.

- 대당서역기 중에서 발췌 요약



미히라쿨라는 간다라의 불교를 철두철미하게 파괴했다고 전한다. 그의 잔인함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전해졌다. 그 내용은 12세기 카슈미르의 역사가 '칼하나(Kalhana)'가 남긴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인도의 북부 지역에는 마치 다른 죽음의 신이 나타난 것 같았다. 그는 야마(죽음의 신)를 능가하기 위한 경쟁을 했다. 그의 군대가 지나가는 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잡아먹으려고 날아다니는 독수리와 까마귀 때를 보고 사람들은 그의 군대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 왕족의 베탈라(악마)는 밤낮으로 수천 명의 살해된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인류의 이 끔찍한 적은 아이들이나 여성에 대한 연민도, 노인에 대한 존경도 없었다.

- 12세기 카슈미르의 역사가 칼하나의 기록

 


단편적인 기록으로 보았을 때, 미히라쿨라는 간다라와 인도에 재앙을 가져온 침략자로 보인다. 하지만 간다라는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지역이자 역사적으로 많은 침략이 있었던 곳이었다. 이 지역에 그리스 예술을 가져온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간다라 미술을 부흥시킨 쿠샨 또한 침략자들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침략자라고 기존의 문화를 모두 파괴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알콘 훈 또한 대당서역기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처음에는 불교에 대해 관대한 접근이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사건으로 간다라 불교의 재앙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인도 불교미술의 발상지인 간다라와 마투라 모두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분명 미히라쿨라는 간다라에 있어서 재앙이었다. 하지만 혹여 그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자료

현장 저, 권덕주 역, "대당서역기", 올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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