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센트 인생

발아래 세상을 살피다

by 로라see

나흘째다. 1센트 동전이 주차장 입구 바닥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 처음 발견된 이후 오늘 아침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에 의식하고 쳐다보는 순간까지 여전히 똑같은 자리에 그대로 누워있다.


내 눈에만 띄는 것인지 어떻게 장장 나흘이라는 시간 동안 1센트는 바닥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을까. 갑자기 1센트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출신: 유럽 중앙은행

무게: 2.30g

지름: 16.25mm

두께: 1.67mm

몸값: 한화로 대략 13.39원


유로화 1센트는 혼자서 절대 여행할 수 없다. 언제나 덩치 큰 형이나 무서운 엄마, 아빠가 옆에 있어야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탈 수 있다. 그리고 우연히 바닥에 떨어져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게 되면 다시는 여행을 꿈꿀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바닥에 떨어진 1센트를 발견하고도 허리 굽혀 줍지 않고 나흘을 보내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허리 숙여 1센트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그 순간 나는 갈 곳 잃은 동전과 지폐를 발견하던 지난 역사들이 떠올랐다.


그 처음은 모두에게 특별한 9살 인생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던 어느 여름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족들과 함께 사촌을 보러 다른 도시로 짧은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중소형차를 타고 뜨거운 고속도로 위를 몇 시간 달리다 보니 온 가족은 찜통에서 폭 쪄진 감자처럼 뜨거운 열기를 품은 채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시원한 그늘에서 음료수 한 잔 하며 더위를 식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그때 우리는 사촌이 살 던 마을로 접어들었고 잠시 후 마을 초입에 위치한 초등학교 앞 조그만 슈퍼를 발견한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 차를 세웠다. 나는 밥보다 달달한 군것질 거리로 필요한 영양분을 보충하며 지내던 아이였고 슈퍼 안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보다 슈퍼 밖 냉동고에 있는 아이스크림이 더 좋았다. 아빠가 슈퍼 안에서 계산하는 동안 나는 월드콘 포장지를 신나게 벗기고 냉동고 앞에 놓여있는 우물처럼 큰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다가갔다. 순간 쓰레기 더미 사이에 다 먹은 과자 봉지와 벗겨진 아이스크림 포장지와는 다른 빛의 종이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건, 연한 오렌지빛을 발산하며 반으로 접힌 오천 원권 한 장이었다. 나는 마치 심봤다를 외치는 심마니처럼 엄마와 아빠에게 달려가 우물같이 생긴 쓰레기통에서 오천 원을 찾았어요, 신나서 자랑을 했다. 쓰레기통 위에서 주인과 헤어진 오천 원은 그렇게 우리 가족의 찜통 같은 더위를 달래주었다.


두 번째 역사는 대학 새내기 시절 잠시 알고 지낸 남자(사람) 친구와 광안리 해변가를 거닐다 쓰게 된다. 늦가을 저녁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바람은 또 어찌나 많이 부는지 우리 둘 모두 집이 바닷가 근처라 데이트고 뭐고 집에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을(말하지 않아도 마음속 생각이 더 잘 전달되기 마련) 하며 걸었던 것 같다. 해변의 모래들이 바람에 날려 내 시야를 연신 공격하려 들고 나는 속으로, 산책 코스를 자연스럽게 우리 집 쪽으로 틀어야지, 꼼수를 부리려던 찰나, 전방 20여 미터(여전히 정확히 기억하는 걸 보니 충격이 컸나 보다) 지점에 뭔가 초록빛이 번쩍이는 종이 뭉치가 보였다.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앗, 이게 뭐지, 성큼성큼 뛰듯이 걸어가는 나를 보고 옆에 있던 남자 친구도 덩달아 함께 뛰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내가 종이 뭉치를 펼치며, 어멋, 만 원짜리 지폐 여섯 장이야, 외치자, 옆에서 지켜보던 그는 숨도 안 쉬고, 우리 그럼 각자 삼만 원씩 가지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후 둘은 어찌 되었을까. 그렇다, 뻔한 결론이다. 우린 각자 3만 원을 들고 각자 집으로 가서 각자의 삶을 살았다.


사실 더 많은 역사가 있지만, 모두 떠올리며 하나하나 열거하면 왠지 흑역사를 쓰게 될 것 같아 그중 가장 유쾌한 역사로 마무리하고 싶다. 몇 해전 스위스 루체른으로 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여행기간 동안 머물렀던 호텔 로비에 있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려는데 변기 옆 쓰레기통( 역사는 쓰레기통 부근에서 이루어지는 걸까) 앞 바닥에 성인 엄지 손가락 만한 크기로 접힌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처음엔 누가 과자 봉투를 꼬깃꼬깃 접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려다 바닥에 떨어뜨리고선 휴지통에 다시 넣지 않았구나 싶었다. 나는 남이 만든 쓰레기를 허리 숙여가며, 게다가 청소를 부지런히 하는 호텔 화장실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를 대신 처리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뭔가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뚫고 다양한 색상들이 화려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접힌 종이를 펼쳤다. 처음엔 손바닥 만한 종이에 누군가 유화를 그려 놓은 줄 알았다. 그런데 10이라는 숫자가 보이고 Suiss라는 알파벳이 보이고 Francs도 보인다. 그렇다, 그건 바로 스위스 10프랑 지폐 한 장이 5번 접힌 채 화장실 변기 옆 쓰레기통 앞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스위스 프랑은 전 세계 여러 나라 지폐들 중 두껍고 빳빳한 재질에 화려한 색상으로 정평이 나있다.


한국돈으로 13.39원만큼의 가치가 있는 1센트를 나는 허리 숙여 줍지 않는다. 대신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브런치에 글을 쓰고 싶어 그 가치를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기록‘이라는 행위를 위해 기꺼이 허리 숙여 사진을 찍는다.


이제 내가 기록한 1센트는 13.39원보다 더 큰 가치, 아니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만큼의 가치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발아래 세상을 살피고 돌아보고 기록해 나가는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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