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消費.
“ 소비 어때요, 소비? ”
오호... 바로 이거다!
다음 달 주제 선정을 위해 열띤 대화 중 누군가 “ 소비消費 ”라는 단어에 집중했고 모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매월 새로운 주제가 정해지고 글을 써야 한다는 중압감은 마치 고해성사를 앞둔 듯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한다.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우리 동네 이웃 주민이 떠올랐다.
우리 집 거실 베란다에서 보이는 풍경은 꽃나무가 옷을 입고 벗는 사계절의 변화와 동네 주민들의 옷차림 변화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웃의 옷차림으로는 도저히 계절을 가늠할 수 없었고 심지어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일 년 내내 같은 옷을 입는 신공을 펼치는 그 이웃은 중년의 부부이다. 주말이면 장을 보러 가는 듯 남편이 한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부인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단순한 애정을 넘어 왠지 모를 애틋함이 느껴진다.
오랜 시간 먼발치에서 동네 주민으로서 인지만 하고 살아왔을 뿐 통성명한 적도 없는 익명의 관계이다. 그 이웃 남편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옷차림으로 출근하고 퇴근하고 주말에 아내의 손을 잡고 장을 보러 간다는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이다.
작년 가을 Fondation Louis Vuitton 전시장에서 그 수많은 관람객 사이에서 나와 그 이웃 남편은 우연히 서로의 등을 마주쳤다. 그날은 전시장이 꽤 비좁게 느껴질 만큼 관람객이 많았다. 살짝 원거리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싶어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누군가의 등에 닿았다. 미안하다 예의를 갖추려 뒤돌다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며 놀랐다.
내 등짝과 닿은 등짝은 그 이웃 남편 것이었고 아내와 함께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같은 옷차림이다. 때마침 작품을 비추는 하이라이트 조명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나란히 꽂히고 있었다. 곧이어 부부의 머리 뒤로 후광이 떠올랐다.
그때 이후로 나는 나의 소비가 물질적 기준에 편향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동안 나는 소비라 하면 그저 내 시간과 돈을 들여서 물건을 사들이는 행위라고만 해석했다. 그도 그런 것이 소비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던지는 뉘앙스는 대부분 물질적이고 부정적이다. 하지만 소비는 자신의 재화를 어떤 가치 기준으로 안배하고 운용할 것인가 하는 매우 철학적이고도 개인의 취향과 기호가 반영되는 영역이다. 즉, 소비는 어쩌면 정신적인 영역에 가깝다.
계절을 가늠할 수 없고 시간의 흐름도 잊게 하는 옷차림의 이웃 부부를 내심 신기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 세월 동안 나는 그들이 취향도 없고 기호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을 미술관 전시회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고 해서 그들이 갑자기 고차원적 삶을 살고 있다고 단정 짓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파리에 그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어도 가물에 콩 나듯 드나드는 내가 판단하고 평가할 입장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민낯을 들여다보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나는 나의 재화를 정신과 물질세계 중 어느 세계에 더 많이 할애하고 에너지를 쏟아붓는가. 우아한 관람을 상상하고 갔다 생각지 못하게 인파가 몰린 어느 주중 저녁 시간 소 뒷걸음치다 등짝을 후려 맞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