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라의 도서관 #45
사랑이라는 것 말일세, 고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어릴 때부터 문학을 좋아했다. 고전문학부터 현대문학까지, 서양 동양 가릴 것 없이 도서관에 혼자 앉아 하루종일 푹 빠져서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아쉽게도 고등학생 즈음부터는 읽어야 하는 책들에 둘러싸여 읽고 싶은 책들을 충분히 읽지 못했다. 그러다 롤라움 커뮤니티 리추얼클럽의 멋진 멤버 아슬란이 <싯다르타> 소모임을 열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3주간 열심히 멤버들과 함께 싯다르타를 읽으며 생각을 나눴다.
그는 마치 이 세상을 맨 처음 보기라도 한 것처럼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세상은 아름다웠으며, 이 세상은 오색찬란하였으며, 이 세상은 기기묘묘하고 수수께끼 같았다.
여기에는 파랑이 있었고, 여기에는 노랑이 있었고, 여기에는 초록이 있었으며, 하늘이 흘러가고 있었고,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숲이 우뚝 솟아 있었고,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삼라만상이 아름다웠으며, 삼라만상이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었고 요술 같았다. 그 한가운데에서 깨달음을 얻은 각자(覺者)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에게로 나아가는 도중에 있었다.
-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헤르만 헤세의 문장은 아름다웠다. 원문으로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하고 문득 멈추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그때 그의 목소리는 마치 한 줄기 빛처럼,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처럼 설법을 듣는 사람들 머리 위에 여운을 남기면서 낭랑하고 고요하게 둥실둥실 떠다녔다.', '여기에는 파랑이 있었고, 여기에는 노랑이 있었고, 여기에는 초록이 있었으며, 하늘이 흘러가고 있었고,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숲이 우뚝 솟아 있었고,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등의 대목에서 오랜만에 문학을 읽는 즐거움을 다시 느끼며 감탄을 거듭했던 것 같다.
나는 바로 자아의 의미와 본질을 배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는 바로 자아로부터 빠져나오려 하였던 것이며, 바로 그 자아를 나는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고, 그것을 단지 기만할 수 있었을 뿐이고, 그것으로부터 단지 도망칠 수 있었을 뿐이며, 그것에 맞서지 못하고 단지 몸을 숨길 수 있을 따름이었다.
진실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나의 자아만큼, 내가 살아 있다는 이 수수께끼, 내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별다른 존재라는 이 수수께끼, 내가 싯다르타라고 하는 이 수수께끼만큼 나를 그토록 많은 생각에 몰두하게 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나 자신에 대하여, 싯다르타에 대하여 가장 적게 알고 있지 않은가!
(중략)
이제 다시는 나한테서 이 싯다르타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지. 이제 다시는 나의 생각이나 생활을 아트만이나 세계고(世界苦) 따위로 시작하지 말아야지. 이제 다시는 나 자신을 죽이거나 산산조각 내어, 그 파편 뒤에 있는 비밀을 찾아내려고 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말아야지. 이제 다시는 『요가 베다』의 가르침도, 『아타르바 베다』의 가르침도, 고행자의 가르침도, 그 어떤 가르침도 받지 말아야지.
나 자신한테서 배울 것이며, 나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나 자신을,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알아내야지.’
-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이 책에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장면 중 하나는 싯다르타가 고타마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싯다르타는 고타마에게 가르침을 받는 대신 자신의 길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퇴사를 하고 나의 길을 찾아나가는 지금의 여정이 싯다르타의 발걸음과 닮아있다고 느꼈다. 회사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멋진 커리어 우먼들을 동경했고, 미국에 가서 일을 하고 일년에 몇 억을 벌어야 커리어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나의 길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까? 그 길은 괴상하게 나 있을 테지, 어쩌면 그 길은 꼬불꼬불한 길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길은 원형의 순환 도로일지도 모르지. 나고 싶은 대로 나 있으라지. 그 길이 어떻게 나 있든 상관없이 나는 그 길을 가야지.
-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하지만 퇴사 후 1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리 대단한 빅테크 기업에 들어가더라도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영역이 아닌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게 과연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지금의 나에게는 한국에서의 가족과의 삶, 시간, 행복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회사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지만(물론 이것도 나름의 고행이지만), 안전한 울타리에서 빠져나와 회사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을 해나가기 위해 스스로에게 몰두하는 과정에서 내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야 하나둘 깨달아가고 있는 것 같다.
본질적인 것이란 눈에 보이는 가식적 세계 너머 저편 피안(彼岸)에 있다고 생각한 싯다르타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예전에는 이 모든 것들이 불신의 눈으로 관찰되었으며, 철저한 사유에 의하여 무화(無化)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차안(此岸)의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그는 가시적인 것을 보고 인식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고향을 찾았으며,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피안의 세계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추구함이 없이, 이처럼 단순소박하게, 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바라보니,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달과 별들도 아름다웠고, 시냇물과 강기슭, 숲과 바위, 염소와 황금풍뎅이, 꽃과 나비도 아름답게 보였다. 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이처럼 미몽에서 깨어나서, 이처럼 주변의 가까운 사물에 마음의 문을 연 채로, 이처럼 아무 불신감도 없이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아름답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진리는 어디에 있고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알아내기 위해 온 생을 바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본질을 추구하지 않기로 다짐한 순간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었다. 더 이상 세상 너머 어딘가에 있는 진리를 향해 눈을 찡그리지 않고, 지금 눈앞에 있는 달과 별과 나비와 황금풍뎅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보기 시작했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본질이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더욱 느끼는 요즘이다. 결국 내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가장 본질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퇴사 이후 '어떻게 하면 더 돈을 벌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도, 돈과 관계없이 의미 있는 기회가 들어오면 흔들리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 시간과 체력은 한정되어 있고, 나는 계속 선택해야 한다. 그 기준을 돈에 둘 것인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관계와 가치에 둘 것인가. 싯다르타의 방황과 탐색은 그 고민을 좀 더 담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주었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싯다르타는 바주데바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가 하는 말을 고요하게, 마음을 툭 터놓고, 느긋하게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바주데바가 자기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초조하게 다음 말을 기다리는 법이 없이, 자기가 말하는 중에도 칭찬의 말도 꾸중의 말도 하지 않고서, 다만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만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이런 식으로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자신을 고백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다 자신의 인생, 자신의 구도 행위,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느꼈다.
-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싯다르타 만큼이나 기억에 남았던 인물은 뱃사공 바주데바였다. 그는 말하지 않고, 듣는다. 싯다르타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바주데바는 초조하게 다음 말을 기다리지 않고, 칭찬도 꾸중도 없이 고요하게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그런 그를 신으로 묘사한다.
'사색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안다면 마술을 부릴 수 있다.' 싯다르타가 카말라에게 했던 말을 함께 떠올리며 나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인가,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인가 생각했다. 바주데바와 강이 가르쳐준 지혜를 잊지 않고 말하기보다 듣는 것, 채우기보다 비우는 것, 달려가기보다 기다리는 것을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이제 자기 아들이 나타나고 나서부터는 싯다르타도 완전히 그런 어린애 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한 인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한 인간을 사랑하고, 어떤 사랑에 빠져 버리고, 어떤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되어 버리는 그런 어린애 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제 그도 인생에서 한 번, 늘그막에 와서야 비로소 가장 강렬하고 가장 진기한 이러한 열정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 열정 때문에 비참할 정도로 괴로운 슬픔을 맛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행복에 젖어 있었고 예전과는 약간 다른 새로운 인간이 되어 있었으며, 마음이 약간 더 부유해진 상태였다.
-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작년에 조카가 태어나 조카를 돌보면서부터 내 삶의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최근에 종종 했는데, 싯다르타 역시 아들이 생기면서 삶의 진정한 괴로움과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정말이지 고통이지만 그 어느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고 있는 중이라, 싯다르타의 이야기에 공감이 많이 되었다.
그들의 허영심, 탐욕이나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이제 그는 웃음거리가 아니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 사랑스러운 일, 심지어는 존경할 만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외동아들에 대해 우쭐해하는 아버지의 어리석고 맹목적인 자부심, 몸에 달고 다닐 장신구를 얻기 위하여, 그리고 사내들이 자기들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애쓰는 허영심 많은 젊은 여인들의 맹목적이고도 거친 열망, 이 모든 충동들, 이 모든 어린애 같은 유치한 짓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억센 생명력을 지닌, 끝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여 확고한 자리를 굳히는 충동들과 탐욕들이 싯다르타에게는 이제 더 이상 결코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무한한 고통을 겪고, 무한한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으며, 그는 그들의 모든 욕정들과 행위들 하나하나에서 바로 생명, 그 생동하는 것, 그 불멸의 것, 범(梵)을 보았다. 그런 인간들은 바로 그들의 맹목적인 성실성, 맹목적인 강력함과 끈질김으로 인하여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고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속세로 들어가기를 택한 싯다르타는, 타락한 것 아니냐는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카말라에게 사랑을 배우고, 상인 카마스와미에게 돈을 배우고, 아들을 키우며 진짜 행복을 배운다.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라고 말한다. 고타마의 가르침이 아무리 옳아도 싯다르타가 직접 걸어야 했던 이유, 강이 말하지 않아도 그 앞에 서야 했던 이유, 아들에 대한 사랑이 고통이어도 그 고통을 직접 겪어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싯다르타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세상을 설명하고 경멸하는 동안, 그가 결국 도달한 것은 사랑이었다.
싯다르타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바주데바와 강처럼 기다리고 들어주면서, 싯다르타처럼 나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그리고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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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인생에 머무를 수 있는 도서관을 만들고 싶어요. 문장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꿈꾸며, 매일 꾸준히 읽고 씁니다. @lola_jjoo @lola__libr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