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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 Jul 07. 2023

누군가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

영화 <케빈에 대하여>

린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케빈에 대하여 말할 것을 촉구하는 이 영화는 에바의 기억으로만 케빈을 조명한다. 에바가 떠올리는 기억의 잔상들과 에바의 시선에 비치는 케빈은 ‘에바’라는 필터를 거친 케빈이다. 램지 감독은 에바의 현실과 케빈에 대한 그녀의 기억들을 마치 잭슨 폴락의 그림들처럼 스크린에 뿌리듯 펼쳐 보인다.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특유의 미장센과 편집은 영화에서 수많은 의미를 만들어낸다. 에바가 그녀의 현실에 닿는 모든 조각들로 케빈을 떠올리듯, 영화의 미장센들이 관객들의 삶과 만나면서 또한 수없이 많은 의미들을 낳는다. 그래서 케빈에 대해 말하라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라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나 보다.


  에바가 떠올리는 기억을 좇다 보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토마토 축제였던 것 같다. 군중들이 그녀를 머리 위로 떠올려 그들이 마치 파도인양, 그녀가 배영 하듯 느낄 수 있도록 그녀를 밀어 넘긴다. 온몸으로 축제를 만끽하는 에바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유’ 그 자체다. 그러나 12시로 하루의 장이 넘어갈 때, 절정의 순간에서 그녀의 행복은 불행의 장으로 넘어간다. 시간이 흐르고 날짜나 계절이 바뀌는 것이 내 계획이나 가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어쩌면 나의 삶 역시 그러한 시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내 의지와 무관한 일이고, 나의 삶 역시 나 아닌 타인이나 환경에 아주 긴밀히 얽히고설켜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는 내 의지로 행복을 연장하거나 획득할 수 있다는 신념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에. 바. 처. 럼. 그런 신념을 가진 에바에게 케빈은 그녀의 인생을 블랙홀로 빠뜨려버린 폭탄 같은 존재이고 괴물이었을 것이다.

  에바는 엉클어져 버린 끔찍한 시간의 끝자락에 홀로 남았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가끔씩 케빈을 면회하는 그녀의 일상은 단조롭다. 그러나 마치 속죄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테러당한 집을 씻어내며 버티는 그녀의 삶은 힘겨워 보인다. 무거운 일상 속에서도 에바는 눈에 닿고 손에 닿는 모든 것들에서 케빈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자신의 모든 것들을 총동원하여 케빈을 이해해 보려는 듯하다. 사람들의 원망과 비난을 받으며 자신이 케빈에게 내뱉은 말들을 떠올린다. 시선에 닿는 풍경들, 눈에 담기는 소품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것들을 매개로 케빈과 자신의 관계를 돌아본다. 에바가 떠올리는 기억의 잔상들을 따라, 그 과정을 따라 관객들은 케빈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온 맘 다해 케빈을 받아들이는 에바의 삶을 보면서 내 삶과 내 태도를 돌아보게 된다.


  에바가 케빈에게 ‘로빈 훗’을 읽어주던 그때, 케빈은 에바와 함께하는 시간을 방해받지 않고 이어가고 싶어 한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싶었던 자신의 자유와 축제의 느낌으로 케빈의 감정을 이해해보려 한다. 그녀가 그랬듯 케빈 역시 그 순간 느낀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지키고 키워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 꿈꾸던 미래를 갖지 못한 현실을 원망하며 살고 있는 자신처럼, 케빈 역시 이룰 수 없는 욕망을 꿈꾸고 이룰 수 없는 현실을 수용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케빈의 욕망이 절정을 넘어가는 순간의 감정을 에바는 자신의 욕구를 멈추지 못했던 순간으로 이해하려 한다. 케빈이 수감되려는 순간 양팔을 벌리고 자유를 만끽하는 표정을 보면서 나는 토마토 축제에서 인파에 떠올려졌던 에바의 표정을 떠올린다. 그리고 케빈이 경찰에게 채워졌던 수갑을 보면서 에바가 오르가즘을 느끼던 순간 손목에 차고 있던 수갑이 내 머릿 속에서 오버랩된다.


에바의 토마토 축제와 케빈의 화살 테러 장면은 교묘하게 혼재되어 있다.

  에바의 토마토 축제 장면에서는 토마토를 던지는 소리가 케빈의 화살 소리로 바뀌고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를 타고 에바의 집에 던지는 페인트 소리로 이어진다. 그 사운드를 감싼 채로 장면은 페인트 테러 당한 에바의 집으로 건너뛴다. 케빈이 수감되는 장면에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사운드에 집중하면 사람들의 절규는 환희의 소리로 바뀌는 듯하면서 토마토 축제 사운드가 묻어있고 케빈의 화살 소리도 담겨있다. 케빈이 화살을 쏘는 장면에서도 경찰차의 소리가 들리고 경찰차의 불빛과 밤의 불빛들이 어울려서 성조기를 떠올리게 하면서 마치 올림픽의 금메달을 수상하는 장면인 듯 여겨지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토마토 축제의 사람들의 함성으로 이어지는 듯하면서 이 세 장면은 결국 하나의 장면으로 세 번 몽타주 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눈에 보이는 장면으로 사운드의 디테일을 따라잡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듣고싶은대로 듣고 넘겨버린다. 이것은 나를 반하게 한 램지 감독의 빛나는 연출이기도 하지만 에바가 케빈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빨간색이 주는 강렬함도 맥락에 따라 축제의 상징이 될 수도 있고, 테러의 공포나 두려움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어찌 그 사람 하나만을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케빈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케빈을 둘러싼 모든 맥락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시간이 연속적이듯, 우리의 삶이나 타자와의 관계도 연속적이다. 다만 숫자가 시간의 경계를 짓듯, 사건이 삶이나 관계에 매듭을 만든다. 에바는 지나온 연속적인 자신의 온 삶과 모든 감정을 동원하여 ‘케빈’을 낳는다는 하나의 현실을 수용하려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할 때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알 방법은 사실 없다. 그래서인지 에바 역시도 자신의 경험을 확장하여 자신의 경험과 케빈의 상황을 세밀하게 교차시키면서 케빈을 이해하려고 한다. 에바에게 있어 케빈을 낳는다는 것은 케빈이 저지른 테러를 감당해야 할 만큼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일 수 있다. 또 테러를 저지른 케빈이 느끼는 감정은 오르가즘을 느끼는 에바의 감정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전제를 두고 누군가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가. 케빈에 대해 말할 것을 종용하는 이 영화는 누군가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그리고 삶을 받아들이는 내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철학적인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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