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e Jun 21. 2023

앞으로 앞으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이하 찬실이)는 감독의 전작 <산나물처녀>를 본 나에게 꽤나 호기심을 당기는 작품이었다. 30분짜리 단편영화 <산나물처녀>는 꽤 인상적이었다. 정신없이 웃다가 영화는 끝이 났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또 집에 와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얘기라 생각했는데 인식과 가치에 관한 여러 잔상들이 남는 영화였다. 30분짜리 유쾌한 스토리에 녹아있던 진득함을 장편으로는 어떻게 풀어가는지 궁금했고 기대되었다.


찬실이(강말금)는 영화 프로듀서다. 첫 장면은 영화촬영장에서 고사를 지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뒤풀이 자리에서 감독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급사하는 감독을 향해 몰려드는 놀란 눈의 스태프들의 몸짓이 슬로우로 걸리면 장중한 쇼팽의 곡이 흐른다. 흑백으로 이어지는 장면에 색이 스미면 빨간 고무대야를 머리에 인 찬실이를 따라 보따리를 든 영화 스텝들이 산동네를 오른다. 실직한 찬실이 이사를 가는 장면이다. 앞선 찬실이를 줄줄이 따르는 스텝들의 행렬이 인상적이다. 힘든 일을 헤쳐나갈 때 늘 앞장서는 찬실이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가진 것도 별로 없고, 직업적으로도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지 못한 40대에 접어든 싱글녀 찬실이에게 주어지는 삶이란 팍팍하기만 하다. 꽉 막힌 듯한 세상과는 다르게 찬실이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방향으로 활짝 열린 인물이다. 사람에 대한 편견도, 일에 대한 선입견도 없다. 그래서 찬실이가 하는 말이나 행동들은 엉뚱하고도 발랄하게 느껴진다. 머릿속으로 생각은 할 수 있지만 감히 꺼내지 않을 찌질해 보이는 말들도 찬실이의 입을 거치면 탄산처럼 시원하다. 그런 것을 보면 찬실이는 마음이 단단하고 건강한 캐릭터다. 자신이 처한 상황들을 정확히 알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한다.


찬실이뿐 아니라 찬실이를 둘러싼 인물들이 다 건강하다. 개성 강한 각각의 모습으로 엉뚱해 보이기도 하지만 삶을 대하는 자세는 진지하다. 한글을 아직 깨치지 못한 산동네 집주인(윤여정), 늘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듯한 찬실이의 친한 배우 동생 소피(윤승아), 찬실이의 연애세포를 간지럽히는 소피 후배 영(배유람). 이들 모두 나름의 애잔함을 자아내지만 하나같이 자신만의 엉뚱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들의 에너지들은 탄산처럼 개운하다. 이들 속에서 찬실이는 휘적휘적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간다.


영화에는 찬실이에게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비현실적이지만 좋은 친구이자 멘토인 주윤발(김영민)이 등장한다. 주윤발은 찬실이의 꿈이 좌절되는 현실 속에서도 찬실이가 자신의 꿈을 붙잡고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독려하는 인물이다. 꿈이나 희망은 언제나 허무맹랑하지만 그 허무맹랑함을 믿고 초희는 나아간다. 우리도 우리의 꿈을, 내 안에 있는 꿈에 대한 의지를 안고 내일 속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첫 장면에서 함께 했던 영화판 멤버들이 마지막 장면에 다시 모였다. 어두운 산길을 걸어 내려가면서 찬실이는 손전등을 들고 서서 먼저 가라고 그들을 앞세우고 뒤에서 불을 밝힌다. 찬실이가 쏘는 손전등의 불빛 위로 필름이 릴에 감기는 듯한 사운드가 입힌다. 불빛이 어둠 속에서 터널처럼 뻗어나가면 카메라는 마치 레일바이크를 탄 듯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터널을 빠져나와 화면이 넓어지면 찬실이의 꿈이 이뤄진 것만 같은 세상이 펼쳐진다. 감독의 시네마천국 같은 세상을 시야에 꽉 채우면서 깊은 숨을 조심스럽게 내쉰다. 끈을 놓지만 않으면 나의 꿈도 긴 터널을 지나 환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무거운 음악과 어두운 색감의 화면에서 죽는 것으로 시작한 이 영화가 하얀 설원 위에서 끝이 나면 타령에 맞춘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읊조림이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올라간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시종일관 웃게 했던 그 공기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웃음이 배꼽 아래로 잦아들면 가슴에 남는 것은 나에 대한 응원이자 내 꿈을 이루라는 주문 같은 여운이 가슴에 들어찬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용한 숨결의 무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