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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 Jun 26. 2023

뫼비우스의 띠

영화 <경주>

장률 감독의 <경주>

경주는 천년 역사를 품은 곳이다. 경주 자체가 문화유적이어서 국내외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옛스러운 첫인상의 경주는 문명의 걸음이 느린 듯하나, 천년을 쌓은 시간의 간격은 그 어느 곳보다도 촘촘하다. 역사를 안고 선 경주는 유적이지만, 당연하게도 현재의 삶이 흐르는 곳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겐 관광지지만,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이자 일상의 영역이기도 할테니까. 


경주 시내에 들어서면 커다란 고분이 시선을 잡아끈다. 고분이란 결국은 무덤인 셈인데 경주라는 장소의 특별함이 관광객들에게는 문화재로, 현지인들에게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사랑을 시작하는 어느 커플에게 그곳은 사랑의 두근거림을 담는 장소가 되고, 천진하게 뛰어오르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철없던 시절의 소풍 장소로 기억되기도 할 것이다. 


영화로 들어가면 누군가에게는 술잔 기울일 수 있는 정자 같은 곳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곳이 일터다. 윤희(신민아)에게는 그저 누군가의 무덤이고, 현(박해일)에게는 안식처다. 아마도 이러한 잔상들은 경주에 대한 장률 감독의 첫인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현은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와서 KTX를 타고 대구에서 경주로 간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혹은 걸으면서 경주를 돌아본다. 점점 더 느린 템포로 경주에 스며들어, 그곳에서의 추억과 기억들을 소환하고, 그가 소환한 것들은 현재형으로 그 앞에 펼쳐진다. 7년 전의 추억도 지금 이곳 경주이고, 옛사랑도 눈앞으로 소환시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그에게는 현실이고, 일본과의 아픈 역사마저도 그가 있는 아리솔에서는 현재와 혼재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은 경주 그 자체라는 느낌을 떼어낼 수가 없다. 그가 동북아정치학 교수라는 설정도 경주의 역사를 담아놓은 그릇으로 보인다. 그는 외부에서 그곳을 찾아온 이방인이기도 하지만, 천년고도의 역사 속에서 경주의 감성을 가장 잘 이해하는 그곳의 주인 같기도 하다. 


현은 타인과 소통이 잘 되지 않다. 소통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와 소통하려 한다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기억과 추억을 되새김하려는 느낌이 더 강하게 전해온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딘가 수동적인 경향이 있다. 아리솔에 들어가거나 윤희네 집에 들어갈 때도 그렇고, 담배를 피울 때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들 속에서도 그는 작용에 대한 반작용처럼 응답할 뿐이다. 그런데도 가만히 보다보면 현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와 간격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가 아닐까 싶어지기도 한다. 현이 묘한 캐릭터로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의 가장 능동적인 행위는 ‘사진 찍기’다. 그에게 닿는 시간은 과거나 역사조차도 현재형으로 존재하지만, 정작 현재에서 맞닥뜨리는 인상적인 순간들은 사진을 찍는 행위를 통해 과거 속에 담아버린다. 시간이 흘러 사진의 순간들이 추억으로 떠오를 때, 그에게 그 시간들은 다시 현재형으로 다가오게 될까? 이런 의문이 드는 순간 섬뜩한 기운이 뇌신경을 깨운다. 그의 모든 시간들은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순간만이 현재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장례식 또한 영화의 시점상 현재라기보다는 이미 그의 기억 속 어느 한 시점의 조각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말미에서 현은 영화의 모든 경계를 뒤흔들면서 그 정체성마저 모호하게 영화 프레임의 가장자리에서 머뭇거린다.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는 말은 바로 이 영화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의미가 밝혀지지만 이미 하늘은 물의 자리로 위치가 전복되어 있다.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물을 내려다보는 기분과 비슷하려나? 무덤으로 시작되는 경주는 삶과 죽음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역사 위에 살고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곳에서는 삶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느낌보다 죽음을 디디며 살아가는 삶이라는 느낌도 준다. 어떻게 보면 경주는 죽음과 삶의 사이클이 긴 역사 안에서 반복되면서 그것들이 혼재되어 명확한 경계 없이 이어져 펼쳐지는 신비로운 곳이기도 하다. 


<경주>는 감독이 깊게 들이마신 경주의 인상을 깊은 숨으로 내뱉으며 빚은 예술이다. <경주>는 영화가 끝나고 기억에 다 담기고 나서야 다시 떠오르는 작품이다. 깜깜한 밤하늘에 떠오르는 초승달처럼 신비로운 인상으로. 모란처럼 깊고 은은한 향이 퍼지는 이 영화 덕분에, 나는 장률감독의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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