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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 Jul 17. 2023

시간의 색깔, 색깔의 향기

영화 <피터 본 칸트>

프랑소아 오종 <피터 본 칸트>

커튼을 여는 것으로 시작해서 커튼을 닫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는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장면으로 보면 오종 감독의 <인더하우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내용 상으로는 <프란츠>를 찍고 난 후 감독 자신의 상황들을 스르르 풀어놓은 것 같기도 하다. 실제와 뒤섞여 허구 속에 녹아든 오종 감독 의 다른 작품에 관한 언급이나 상황들이 한 조각씩 툭툭 떨어질 때마다 감독의 팬이라는 확인 사살을 받는 것만 같다. 


코로나 상황에서 만든 영화들의 실내촬영으로만 한정되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데 이 영화도 같은 맥락인지 영화의 주 공간이 ‘피터 본 칸트’의 집이다. 공간이 한정적인 만큼 인물의 개성을 선명하게 표현한다.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이 캐릭터에 딱 맞는 분명한 색을 입고 연극무대에 선 배우처럼 바짝 다가선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펼친다. 덕분에 관객은 인물의 면면을 더 가깝게 들여다볼 수 있다. 그 강렬한 연기는 마치 향이 되어 후각을 자극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주인공 ‘피터 본 칸트’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감정과 뉘앙스만으로 서사가 이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작품을 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피터 본 칸트를 충성스럽게 보좌하는 어시스턴트이자 비서인 칼, 한때 피터 본 칸트의 뮤즈였던 시도니, 시도니를 통해 알게 되어 피터 본 칸트의 마음을 단번에 뺏어버린 매력남 아미르. 누구의 시선으로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이 작품은 또 다른 메시지를 가질 것만 같다. 관객들은 각자 마음이 가는 인물을 껴안을 것이다.  


크고 대단한 사건들이 생기진 않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이들은 존재만으로 긴장감을 자아낸다. 한껏 치장한 이들을 초근접거리에서 바라보다 보면, 로에게 가 닿는 미묘한 시선들과 서로에게 내보이는 오묘한 뉘앙스들로 쌓여가는 감정들이 관객들의 눈과 호흡을 사로잡는다. 한없이 섬세하고 디테일한 연기를 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관객들 자신의 이야기를 입혀 완성시켜야만 할 것 같다. 대단한 배우들의 대단한 연기가 정말 볼 만하다. 


누군가의 집 커튼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그 집 사람들의 일상을 초근접거리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우린 그들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한껏 치장하고 꾸민 모습이어도 말과 행동, 눈빛과 표정들은 숨길 수 없고 속일 수 없는 분명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영화는, 마치 마술쇼를 펼치는 마술사의 뒤쪽에 자리를 배치하고 관객들을 우롱하는 마술사 같은 태도로 영화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모든 배우들은 제각각의 반전으로 관객들에게 서늘함을 선사한다. 


서늘함을 안고서 커튼을 닫아버리고 나면, 다시 말해 이들의 감정들이 절정으로 치닫고 각자의 방식대로 요동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한바탕 겪고 나면, 이제 쇼 같은 연극은 끝이 나고 진짜 영화가 시작된다. 모두가 떠난 허망한 공간을 영사기가 내뿜는 과거의 시간들이 가득 메운다. <시네마천국>의 엔딩을 연상케 하는 마지막 그 장면은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돌이킬 수 없는 상황, 되돌릴 수 없는 마음들이 마치 현재처럼 스크린에 펼쳐진다. 이어 엔딩 크레딧이 오르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줄만 알았던 오랜 기억 하나가 내 맘 어딘가로 훅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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