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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 Aug 11. 2023

시작인지 끝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영화 <군산>

장률 감독의 <군산>

장률 감독의 영화에서 공간은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장률 감독은 공간을 영화의 주된 요소로 삼는다. <이리>, <두만강>, <경주>, <군산>, <후쿠오카> 등 그의 작품 중 공간 자체를 제목으로 삼은 작품들이 많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영화에서 공간은 매우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그 공간에서 받은 인상과 그곳이 지닌 다양한 의미들을 독특한 감성으로 풀어가는 식이다. <군산>도 다르지 않다. 아마도 감독이 군산에 처음 닿았을 때 받은 인상과 군산을 여행하며 느낀 것들, 그곳에 머물며 생각한 것들을 인물이나 스토리 속에 잘 녹아들었다.


영화에서 군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답답하다. 마을로 들어가는 터널이나 민박집으로 들어가는 길처럼, 군산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동선은 어딘가 깊게 빨려 들어갈듯한 공간을 거쳐야만 한다. 신비롭다기보다는 음산한 느낌이 들지만, 그렇게 들어선 공간이라 그런지 공간을 더 집중해서 보게 되는 것 같다. 영화에서 군산은 인적이 드물다. 오가는 사람들도 없고, 말 붙일 누군가도 없다. 밥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민박집에서 사람을 만나긴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단단한 뚜껑을 덮은 채 홀로 존재하는 이들 같다. 간간이 대화를 나누긴 하지만, 소통이라기 보단 필요한 말들을 주고받는 것뿐이다, 그런 곳에 윤영(박해일)과 송현(문소리)이 들어섰다. 그들이 딛고 선 땅은 폐쇄적이고 그들이 내다보는 바다는 흔들린다. 갑갑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좁고 답답한 골목을 걷는다.


가만히 그들에게 다가가보면, 제각각의 아픔과 상처를 안고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 아픔과 상처는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국만큼은 선명하다. 과거의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고, 오늘의 나는 너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상처들까지도 더해져 무거워진 지금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랑을 꿈꾸며 서로 다가서도 결국 상처만 주고받게 되는 것 같다. 일본의 흔적들이 유난히 많이 남은 군산의 지금은 지난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감싸 안은 채로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만 같다. 그 상처 안에서 저들은 또 까끌까끌한 생채기를 누군가에게 던지며 살아가고 있다. "군산은 사랑하기 좋은 곳이더라"는 감독의 말은 그래서 이 영화를 더 애잔하게 보게 하는 장치인 것만 같다. 


윤영과 송현이 군산에 닿은 것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초반부에 어딘가 쭈뼛쭈뼛한 관계로 출발한다. 군산여행을 계기로 달달하게 피어오르게 될 것인가에 주목하게 되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 간다. 군산의 시간은 군산여행을 기점으로 그전과 후를 넘나들면서 넓게 확장된다. 가만히 보다 보면 군산에 닿은 것은 시작도 끝도 아닌 그저 어느 한 시점일 뿐이다. 닿은 것이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고,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사실 관계의 시작과 살면서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는 시작의 순간에 배신당할 때가 많다. 누군가와의 연애가 그렇고 1월 1일이 주는 그 느낌도 그렇다. 하지만 시작인지도 몰랐던 과거의 그때가 시작이었고 또 지나고 나서야만 끝인걸을 알게 되면서 시작과 끝은 모든 것을 다 지나고서야 알게 되는 과거 속 개념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일상에서 누군가와의 관계에 대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재의 어느 시점을 처음으로, 혹은 끝으로 알아채거나 의미 있게 기억할 수는 없다. 처음은 언제나 기억 속에서 태어날 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끝이 나도 이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것 같다. 윤영은 윤영이 나아가는 대로, 송현은 송현이 머문 대로 이들의 이야기는 마치 내 삶과 같이 끝나버린 영화의 어느 끄트머리에서 지속되는 것 같다.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져갈지, 다른 만남이나 다른 관계의 시작일지 끝일지 모르는 채로 영화는 끝난다. 마치 감독의 바람 같다. 이들의 상처가 나아지기를, 삶이 나아가기를, 더 넓게 흘러가기를... 

내가 만나는 누군가, 내게 닥치는 어떤 일들! 그것은 무언가의 시작인지 끝인지 아니면 더 큰 어떤 것을 위한 과정인지 모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나도 힘을 내어 또 한 발 내딛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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