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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 Jul 14. 2023

0에 대한 잡생각

'0으로 나누면'(테드 창)을 읽다가

  요즘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단편집인데 '0으로 나누면'이라는 작품이 곱셈과 나눗셈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나눗셈은 곱셈의 역이기 때문에 같은 수로 나누었다가 다시 곱하면 원래의 수로 돌아오는 것이 수학의 기본 법칙인데, 0은 그게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수를 0으로 나누었다가 다시 0으로 곱하면 그냥 0이 되어버리지 않냐는 거다.


  나는 어릴 때부터 숫자를 좋아했다. 사칙연산을 할 수 있게 됐을 때부터 지나가는 차 번호를 보면서 이렇게 이렇게 더하고 저렇게 빼면 0, 그렇게 하면 1, 저렇게 하면 2... 하면서 4자리 숫자를 연산하는 놀이를 했다. 그러다 막히면 지나가는 다른 차의 번호를 보고 또 그렇게 했다. 심지어 철학 수업 과제로 수가 세상의 진리를 함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논지로 레포트를 쓰기도 했다. 숫자놀이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데 저 단순하고 당연한 생각을 나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것에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이게 자존심이 상할 일이야?라는 생각도 든다.)


  한참을 생각했다. 아니 한참 멍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0을 수라고 할 수 있을까? 가만히 있다 보니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0은 수라기보다는 그냥 개념 자체가 아닐까. 그럴까? 생각하다 보니까 문득 감사함이 느껴졌다.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0. 무자비하면서도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공포이기도 하지만, 지긋지긋한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구석도 있다.


  살다 보면 0을 만날 때가 있다. 결코 되돌릴 수 없어져버리게 되거나, 내가 무엇을 가졌었는지 흔적조차 남기지 않게 되는 때. 그럴 때 우리는 삶이 망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걸 계기로 새로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또 머리를 비우고 멍하게 있어봤는데 0은 만나는 순간보다는 만나고 난 이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비우면 생각이 스미듯이 0을 만나 싹 비워지면 비움과 동시에 무엇인가 스며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0의 생김새가 저렇다는 것도 그 개념을 이미지화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0의 이미지만 남기고 머리를 다시 싹 비우고 멍하니 있다 보니 0을 만날 때는 주변 환경이 중요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리고 싹 비워지면 무언가가 다시 스며들 것인데, 그 스며드는 것은 반드시 0을 둘러싼 주변의 것들이 밀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0을 언제 만나게 될지 예측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환경은 항상 정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0의 생긴 모양을 보면 안과 밖을 구분하는 듯 보이지만, 안과 밖을 구분 지으며 경계를 막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0은 우리가 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생긴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개념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근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 죽음과 삶에 대해서도 그러한 개념을 적용해 생각해 보면 종교에서 말하는 그러한 것들과도 맥락이 닿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 그때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것, 지금의 모든 죄가 다 사하여진다는 것, 그 모든 것들도 0을 만나는 것으로 생각해 보면 납득이 된다. 0으로 나누어서 다시 같은 수를 곱해도 내 원래의 수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뜯어보면 인생을, 그 이후를 이해하게 될 수도 있다. 어떤 종교의 그 어떤 삶의 원리도 결국 0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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