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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 Dec 22. 2023

달달하다 했다 내가. 그럼 그렇지.

2

  사람들이 번화한 거리를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온통 설렜다. 일요일 오전 8시에도 사람들은 바빠 보였다. 큰 사거리에서 온 방향으로 바삐 걸어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어리둥절했다. 오가는 사람들을 한참 바라보다 눈이 딱 마주친 한 남자에게 처음으로 입을 뗐다. "엑스큐제 무아. 봉주흐, 므슈~" 그는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한 사간 남짓 오면서 내내 연습했던 말을 더듬더듬 내뱉었다. "저는 호텔에 가고 싶어요. 여기예요. 트램을 어디에서 타야 하는지 제발 저에게 말해주세요." 


  수첩에는 내가 어디에서 뭘 타고 어떻게 이동해야 하는지 꼼꼼하게 적혀있다. 하지만 원어민의 프랑스어를 듣고 싶었다. 그는 내가 내미는 지도를 성의 있게 쳐다보다가 순간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재킷 안 주머니에서 신분증 같은 걸 꺼냈다. 그리고 '알리'라고 쓰여있는 자신의 이름 옆 긴 프랑스어를 짚으며 자신의 집이 내 목적지와 매우 가깝다고 했다. 알리는 트램을 타지 말고 자신이 기다리는 버스를 같이 타면 된다고 했다. 더 가깝고 편한 길이라고 했다. 


  계획에 없던 상황이라 순간 버퍼링이 생겼다. 고민이 채 끝나지 않은 사이 버스가 왔다. 알리는 내 눈을 바라보며 "오케이?" 했는데 나는 수첩과 버스를 교차로 바라보다 흔들리는 눈으로 알리를 보며 대답하지 못했다. 알리는 "오케이!"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캐리어를 들어 버스에 올려주었다. 나는 캐리어에 달려 버스에 올라 기사님께 노선을 확인했다. 기사님이 "오께!"하며 외쳐 주셔서 안심하고 그제야 마음도 버스에 실었다. 알리는 이미 맨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손바닥으로 자기 옆자리를 톡톡 쳤다. 


  INFJ인 나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이 상황이 아무래도 불안했다. 버스 창 위쪽에 붙어있는 노선도를 꼼꼼히 살폈다. 아무리 살펴봐도 '레오 라그랑주'는 찾을 수 없었다. "아 실례합니다. 안녕하세요. 이 버스, 음... 레오 라그랑주?" 노선도 밑에 앉은 승객은 맞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노선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난 뒤에 앉은 다른 승객에게도 물었다. 그 뒷사람에게도 물었고 반대쪽에 앉은 승객에게도 물었다.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맞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알리는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들어와 앉으라는 것 같았다. 승객도 많지 않은 버스에서 못 믿은 티를 너무 냈나 싶어 민망했다. 나는 알리 앞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 버스가 출발했다. 앗! 나 때문에 버스가 출발하지 못했던 걸까?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알리는 고개를 떨군 내 등을 톡톡 치더니 내 옆자리로 왔다. "네가 가려는 곳은 빌레쥐프야." 창문 위 노선도에 한 점을 손으로 찍으며 말했다. 그리고 구글맵을 켜서 내 목적지를 찍어줬다.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너를 책임지고 호텔에 데려다줄게~"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내렸다. 알리는 "이제 조금만 가면 돼."라고 하면서 나를 이끌었다. 그런데 한참을 걸어도 구글맵의 굵은 선은 짧아지지 않았다. 이게 맞나 싶었다. 드르륵드르륵 유난히 시끄러운 캐리어 바퀴 소리를 멈추며 알리가 말했다. "너 캐리어 몇 킬로야? 왜 이렇게 무거워." "아! 미안해. 이제 내가 끌게." "아니야. 내가 끌어도 힘든데 네가 어떻게 끌어. 내가 할게." 뭐야 갑자기. 왜 달달한 거야. 맘을 훅 녹이더니 말했다. "저기 저 흰 건물 보여? 우리 집이야. 내 아파트." 그리고 내 눈을 쳐다봤다. 


  "아~ 알았어. 잘 가~" 하며 캐리어를 받으려고 했는데 알리는 캐리어를 더 세게 잡았다. 자기 집을 지나치며 한참을 더 걸었다.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미안한 맘이 스밀 때마다 집에 가라고 했는데, 그는 계속 걸었다. 그 대화를 몇 번 더 나누다가 결국 알리는 멈춰 섰다. 그리고 캐리어에서 손을 뗐다. "너 아까 그 아파트 기억나지?" 불안했다. "거기에 내 차가 있어. 여기서 기다려. 내가 차를 가져와서 차로 너를 데려다줄게." "괜찮아. 넌 이제 집으로 가. 밤새 일해서 피곤하겠다." "아니야 꼭 기다려 베이베."


  빨리 돌아오려고 빠르게 걷는 걸까. 날 버려두고 가버리려는 걸까.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알리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면서 그가 다시 올까 오지 않을까,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생각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알리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아카시아 잎이라도 하나씩 뜯어보고 싶었다. 9시에 체크인을 하기로 했는데 이미 9시가 넘어버렸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였는데 주인이 10시엔 나가봐야 한다고 해서 늦어도 10시 전엔 무조건 가야 한다. 휴...


  걷던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알리든 버스든 택시든 뭐든 먼저 오는 걸 타기로 결심했다. 울퉁불퉁한 블록 위로 캐리어를 끄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겨우 5분 남짓 끌어도 땀이 났다. 알리가 새삼 고마웠다. 5분쯤 더 가다 보니 한 아주머니가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다가가 말을 걸고 물어봤다. 여기서 레오 라그랑주에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지, 레오 라그랑주에 가는 지하철을 타려면 어느 역에 가야 하는지, 버스는 자주 오는지, 택시는 자주 오는지. 무심한 눈빛의 그녀는 온통 부정적인 대답만 했다. 

 

   계획이 다 틀어진 나는 일단 무심한 그녀 옆에 앉았다. 당신의 버스는 언제 오냐고 물어봤는데 그것도 모른다고 했다. 아니 진짜 몰라서 모른다는 걸까 그냥 나랑 대화가 하기 싫은 걸까.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핸드폰 로밍이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싶었다. 노트에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하고 왔는데 첫 발자국부터 이모양이라니. 일단은 뭐라도 타고 지하철 역이나 지하철 역 가까운 데까지라도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참을 앉아 있어도 진짜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하... 사기꾼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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