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e Dec 29. 2023

진심과 의심 사이

3

  처음부터 꼬인 여행은 나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낯설고 새로운 곳에 오면 우중충하고 답답한 나의 기운도 환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었나 보다. 비행기를 타고 건너오면서 다 날려버린 줄 알았던 자욱한 연기들이 어디 숨었다 스멀스멀 다시 나를 꽉 채우는 것 같았다. 목적지가 있기는 한 건가 싶게 멍하니 앉아있는 아주머니 옆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축 쳐져 앉아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회색 차 한 대가 후진으로 슬금슬금 오더니 내 앞에 섰다.


  "헤이!" 드라마 장면처럼 느린 속도로 창문이 내려갔다.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왜 이렇게 멀리까지 왔어." 알리는 정말 애타게 찾은 눈빛을 보여주고선 차에서 내렸다. 나를 안을 듯이 저돌적으로 다가온 알리는  내 캐리어를 끌고선 빠른 손놀림으로 트렁크에 실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앗! 이거 맞아? 어리둥절하는 사이 나는 또 그의 손에 이끌려 차에 올랐다. "나는 너에게 기다리라고 말했어. 이해하지 못했니? 왜 떠났어. 한참 동안 찾았어. 하지만 이제 괜찮아"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너 너무 예뻐." "인형 같아." "목소리도 너무 귀여워." 나를 쳐다볼 때마다, 내가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알리는 사랑이 쏟아질 것 같은 눈빛으로 전혀 익숙지 않은 칭찬을 쏟아부었다. 행복감 대신 불안감이 스몄다. "알리! 너 길 모르잖아! 왜 지도도 안 보고 운전만 해?" "오 베이베 쏘 프리리." "아니! 너 폰 꺼내 봐~ 지도를 보자고!" " 오 마이 베이베, 여기 있어! 네가 꺼내." 가슴팍을 내밀며 말했다. "야! 그건 니 손이 해야만 할 일이야." 오 마이 갓! 너는 진짜 너무 귀여워."


  나와 내 캐리어를 싣고서 동문서답만 하는 알리는 함께 밥을 먹자고 말했다. 진짜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그저 어설픈 내 프랑스어를 귀담아 들어줄 것 같은 사람으로 눈에 띄었을 뿐이었는데, 그는 프랑스인도 아니었고 아랍에서 일하러 넘어온 외국인노동자였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런저런 차별을 당한 사례를 들으며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머릿속에는 이 사람이 날 탈레반에다 팔아먹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너무 나갔다 싶으면서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웠다.


  "나와 함께 밥 먹지 않을래?" "초대해 줘서 너무 고마워. 나도 너와 밥을 먹고 싶어. 하지만 나는 지금 너무 피곤해. 나는 거의 24시간 비행기를 탔고,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씻지도 못했어. 너무 더러워." "걱정하지 마. 너는 너무 예뻐." "무엇보다도 지금 나는 체크인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겼어. 그래서 너무 불안해. 빨리 체크인을 하고, 씻고, 잠도 좀 자고 싶어. 네가 괜찮다면 나는 너와 저녁식사를 하고 싶어." "오 마이 갓! 오케이." "고마워. 그럼 나 빨리 체크인을 하고 정리하고 저녁에 다시 만나자."


  어떻게든 알리를 구슬려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면 정말 다행인데 캐리어를 못 찾을 경우, 이 사람의 정보를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나의 이런 생각들이 너무 미안한 일이지만, 여기서 내가 죽거나 팔려버리기라도 한다면... 나의 불행을 누가 언제쯤 알아채 줄까? 확!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엔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음... 아직... 에펠탑을 못 봤다.


  "엘리, 너 많이 피곤하면 우리 커피 마시자." "아~ 나 커피 너무 좋아해. 하지만 지금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 "테이크아웃 오케이?" "파리에서 마시는 커피를 나는 지금 너무 기대하고 있어. 파리에서 처음 마시는 커피는 정말 맛있는 커피여야만 해. 이따가 저녁 먹고 맛있는 커피도 먹자. 오케이?" "나는 너에게 정말 맛있는 커피를 마시게 해 줄 수 있어." "고마워. 너 폰 좀 꺼내 봐. 내가 빨리 체크인을 한다면, 너와 더 오랫동안 만날 수 있어. 오케이?"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줬다. 처음 보는 핸드폰 기종에 당황스러웠다. "이거 구글맵 켜봐." "오 마이 베이베, 넌 정말 귀여워." 그래 영어를 어버버 하게 하는 게 귀여운 거구나. 근데 제발 그 소리 좀 집어치우고 맵 좀 켜 봐 제발. "알리, 나는 빨리 체크인을 하고 너를 만나고 싶어. 지금 체크인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저녁에 널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 제발." 애걸하는 나의 부탁을 들어주면서도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은 표 정을 지었다. "그럼 몇 시에 저녁을 먹을까? 어디서 만날까?" "제발. 체크인 먼저. 제발. 제발. 제발."


  알리는 애걸복걸하는 나를 즐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자극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았는가. 반드시 이 상황을 이겨내야 한다. "엘리, 저기 커피가 진짜 맛있어." 하... 이 새끼가 진짜... 알리가 가리키는 곳은 까르푸였다. 아니 까르푸 커피가 맛있다는 게 말이나 돼? 우리나라로 치면 이마트나 롯데마트 커피가 맛있단 거잖아. 그런 꼼수에 내가 속아 넘어갈 리가... 그러다 문득 까르푸 옆에 조그마한 파출소 같은 곳이 눈에 띄었다. 어!!!


  그저 아무렇게나 막 내뱉는 것 같은 알리는 딱히 설 생각도 없이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진짜로 커피를 마실 생각이 그에게도 없는 것만 같고, 그저 상황을 즐기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다급하게 외쳤다. "좋아. 저기 커피 마시고 싶어. 지금 당장. 바로 이 순간." 오히려 알리가 놀랐다. "정말이야?" "응. 테이크아웃 오케이?" 알리는 파출소 앞에 차를 세우고 자기가 커피를 사 오겠다며 빠르게 차에서 내렸다. 나도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따라 내렸다. 그리고 그의 차 번호와 그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을 몰래 찍었다.


   "넌 기다리고 있어. 내가 사 올게." 뒤돌아보는 알리 때문에 주저앉을 뻔했다. "아니야 내가 살게. 그리고 구경하고 싶어." 커피에 뭘 탈지 알 수 없었다. 바짝 무장한 정신으로 따라갔다. 알리는 까르푸로 들어가 계속 걸었다. 코너까지 가서 또 걷기만 했다. 아니, 카페 간다며!! 나는 핸드폰을 꼭 쥐며 한번 더 코너를 돌 때까지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코너를 딱 돌자마자 '아니 이런 대낮에 어둠을 어디서 가져왔지?'싶은 어둑한 분위기에 은은한 조명이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와~ 정말 멋지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정말이지 멋진 곳이었다. 서부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신비롭고 멋진 카페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은 곳이었다. "마시고 갈래?" "앙 카페 씰부쁠레. 테이크아웃 플리즈" 커피 달란 말은 제일 먼저 연습한 프랑스어인데, 테이크아웃은 모르겠다. 가죽조끼에 가죽 부츠, 모자까지 완벽히 서부영화 주인공인 사장님이 커피 두 잔을 뽑아내는 동안 알리와 나는 서로 계산하겠다고 실랑이했다. 사장님은 다가와 손으로 내 지갑을 막았다. "나는 내 친구의 돈을 받기로 결정했어. 알리는 내 친구고, 너는 알리의 손님이야. 오케이?"


  커피까지 정말 완벽했다. 이 커피가 정말 맛있는 걸까 파리의 모든 커피가 다 맛있는 걸까. 커피에 푹 잠겼을 때 문득 아까 봤던 건물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한 번 정신이 번쩍 했지만 흥분하지 않았다. “알리! 우리 누구에게 길을 좀 물어보자.” 알리는 배시시 웃으며 괜찮다며 또 나를 쳐다봤다. 유아쏘프리리란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헤이! 스탑!! 왓아유두잉나우!! 스탑히얼!!!” 하필 인도를 쓸고 있는 청소부를 가리키며 단호히 말했다. "저 사람한테 물어봐."


  놀란 알리는 프랑스어로 그 청소부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갑자기 왕복 2차로에 차를 세운 바람에 뒷 차들은 줄을 섰다. 안부인사 나누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나는 주소가 써진 수첩을 그에게 내밀었다. 수첩을 들여다본 청소부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리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고, 나는 불안했다. 하.... 청소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길을 물어봐주는 것 같았다. 난 그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의 눈빛, 표정, 손짓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흡수했다. 알리가 뭐라고 말을 걸었다. “조용히 좀 해!”


  우리가 출발할 때까지 한 번도 재촉하지 않은 뒷 차들에게도 너무 감사했다. 알리가 좌회전 깜빡이를 넣었을 때 나도 모르게 말했다! "헤이 커먼. 너 왜 좌회전해! 아까 분명히 우회전하랬잖아!" 인사말 밖에 할 줄 모르는데, 난 청소부의 말을 다 알아들은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그런 초능력이 있다니! 점점 가까워지자 알리는 자꾸 차를 돌리려고 했고, 그때마다 나는 "헤이 커먼"을 외쳤다. 목적지에 다가오자 알리는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고, 나는 로밍을 안 했다고 했다. "내가 호텔에서 너에게 전화할게 니 전화번호를 줘~."


  마지막 두 블록을 앞두고 그는 역주행을 하려고 했다. 일방통행로를 역으로 만났는데 무시하고 진입하려고 하길래 세우라고 했다. 알리가 전화번호를 적는 동안 나는 차문을 활짝 열었다. 더 열리지 않을 만큼 최대한 열었다. 그가 번호를 다 적고 내게 내밀며 나를 바라봤다. 받아 들려는 내 손을 꼭 쥐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키스 미 베이베!." 너무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는 척했다. "미안해. 나 비행기를 이틀 탔어. 너무 더러워~" 알리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트렁크 열어!"


  큰 도로가 아니라 한적하고 넓은 주택가 골목이었다. 오가는 차도 없었고 누구 하나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알리는 입을 앙 다문 내 표정을 살피더니 트렁크를 열었고, 그제야 나도 따라 내렸다. 따라 내리면서도 차 문은 닫지 않았다. 활짝 열어둔 그대로 뒀다. 혹시라도 나를 버리고 내 캐리어를 실은 채로 가버리지 못하게 말이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캐리어를 내리려 하자, 알리는 더 서둘러 먼저 가 짐을 내렸다. "데려다줄게~" 하며 내 캐리어를 끌었지만, 낚아챘다. "내 생각에는 차를 여기다 두면 안될 것 같아."


  알리는 따라오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하고 내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느껴졌다. "너 이따가 전화할 거야?" "응. 체크인하고, 씻고, 자고 일어나면 전화할게." "몇 시?" "나도 몰라." "꼭 할 거지?" "응."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무서워하는 내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직 긴장을 풀면 안 된다. 알리는 미련을 듬뿍 담아 나를 불렀다. "엘리~ 헤이 엘리." 깊은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고 뒤돌아보며 웃었다. "알리~ 고마워! 이따가 만나! 일어나서 전화할게~" 알리는 텅 빈 미소를 지었다.

이전 02화 달달하다 했다 내가. 그럼 그렇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