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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Oct 11. 2017

기억해, 카사블랑카

모로코 여행 에세이-카사블랑카

“어느 나라 사람이요
(What is your nationality)?”


어디서 자주 들어보던 질문이다. 카사블랑카에 도착하자 누가 물어본것도 아닌데 이 질문이 떠올랐다. 난 어느 나라 사람일까? 잠시 혼돈이 왔다. 어릴적 명절 음식으로 포만감을 가득 느끼며 온 가족이 같이 보았던 ‘카사블랑카’라는 오래된 영화 대사중에 이 질문이 있었다. 이 영화로인해 어리지만 처음으로 ‘로망스’가 뭔지를 알려주었고 로망스는 항상 비극으로 끝난다는 슬픈 공식을 나에게 쇠뇌시킨 영화였다. 안타깝게도…


독일 나찌 소령인 스트라서(Strasser)는 릭(Rick)에게 다짜고짜 국적을 묻는다. 국적에 따라 적과 동지가 칼날처럼 구분되던 야만의 시기였다. 그 국적이란 꼬리표는 당시 온갖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던 국제도시이자 로망스의 도시였던 카사블랑카에서도 자주 묻고 대답되곤했다. 쑥스러운 로망스도 사실 느끼기 나름이지만 적어도 당시 카사블랑카의 몇몇 사람들은 국적의 한계를 넘어서려던 열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국적으로 나와 너로 분리하려던 사람들이 더 많았다. 대서양을 마주하는 당시 카사블랑크는 요즘의 뉴욕이나 파리 또는 런던이나 홍콩같은 활기찬 국제도시였다. 비록 프랑스 식민치하였고 정작 주인인 모로코 지역사람은 로망스고 뭐고 멀리 떨어져 전혀 다른세계를 살았지만 말이다. 대신에 카사블랑카 영화처럼 그런 로망스의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고 할까. 나중에 릭이 술이 취하자 르노(Renault)가 ‘그럼 릭은 세계 시민이네(That makes Rick a citizen of the world)’라고 했던 것처럼 술취하지 않곤 열린 세계시민이 되지 못했던 시기였다. 1942년에 만들어졌으며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와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이 나온 이 영화는 세계적으로 엄청 인기를 얻었다. 아카데미 상 후보에 무려 8개부문에 올라 3개부문을 그것도 최고 작품상을 탄 이 영화는 대한민국 명절 영화의 공식목록에 항상 올라왔다. 로망스의 비극을 순진한 국민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이었을까? 하여튼, 자라나는 새싹동이 꼬마였던 나에게 학교에서 못배운 로망스는 비극이라는 진리를 보여준 명작이었다. 그래서 직접 이 영화의 배경인 카사블랑카에서 대서양 따뜻한 물에 적시니 이 두 가지 ‘로망스'와 ‘비극'이 동시에 해수면 위로 둥글게 떠올랐다. 그러나 태양은 두일리가 없다. 그래서 카사블랑카는 하나이지만 이 두가지 요소를 동시에 품고있다. 그리고 이 명화의 배경인 카사블랑카에 온몸을 부대끼며  어릴적 14인치 텔레비전 화면속 장면과 연결을 시도했지만 사실 영화촬영은 거의 다 로스엔젤레스 외곽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런… 헛꿈이었구나. 카사블랑카는 비극보다 먼저 허무를 느끼게했다. 심지어 비행장 장면까지도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영화는 픽션이다. 잡을 수없고 이룰 수없는 꿈을 효과적으로 쇠뇌시킨다. 그래서 드림 팩토리(Dream Factory)라 하지 않았을까? 그 허구의 생산품을 관객은 소비한다. 허구를 상상하며 실제처럼 느끼고 영향을 받은 소비자였던 난 바보였다. 바보... 그러나 바보라도 좋았다. 이곳 카사블랑카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서 머리속에 잠재된 기대와 허구속의 카사블랑카와 억지로라도 연결시키지 않으면 카사블랑카에 실망한다. 대서양에 면했지만 지중해의 온화한 카사블랑카 날씨땜에 유럽인들에게 인기가 있었을까? 그 바다는 카사블랑카를 카사블랑카로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그 바다를 위해 사각의 빌딩들을 바다를 향해 지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해변과 해변뒤로 솟은 빌딩들이었다. 그렇다. 부산이었다. 해운대처럼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빌딩들이 오로록 줄서있는 카사블랑카는 20년전 부산과 판박이었다. 지금 부산은 카사블랑카에 비해 훨씬 더 높고 더 많은 빌딩으로 아예 개조를 해 놓았지만 카사블랑카는 20년전 부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산과 카사블랑카는 자매 결연도시였다.



부산과 카사블랑카가 비슷하다고 했지만 하나 다른 것은 카사블랑카의 모스크였다. 특히 해변가에 위치한 ‘하산 2세 모스크(The Hassan II Mosque)’는 카사블랑카 스카이라인, 아니 시-라인(Sea-line)의 백미였다. 1993년에 완공된 이 모스크는 우선 그 큰 규모에 놀랐다.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 중의 하나라 들었다. 그래서  걸어들어가는 것만해도 숨이찼다. 바닷가 소금기가 들어와 짭잘했다. 분명히 가이드는 13번째로 큰 모스크라고 서너번 강조했고 거기에다 미나렛(Minaret. 모스크 기둥. 탑위에서 무슬림 기도소리를 전한다.)은 210미터로 세계 최고로 높은 종교 건축물이라고 하였고 약 60여층 건물정도 된다고 하였다. 세계최고! 편편한 바다인데 그 멋진 배경으로 무엇을 그리 뽐내려 세계 최고 높이의 미나렛을 세웠을까? 바다와 함께 한 포스트 카드 배경은 볼수가 없었다. 프랑스인 건축가 미셸 빵소(Michel Pinseau)가 설계했으며 최대 십만명의 인원이 함께 기도할 수 있을 정도라 하였다. 십만명이라, 축구장 정도의 규모라 생각했지만 사실 모스크밖 광장까지 합쳐서 그렇지 모스크 실내는 약 이만 오천명을 한번에 수용할 수 있다 한다. 가이드도 ‘뻥’이 심했다. 그래서 팔만명 정도가 모스크 밖 광장에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이된다. 문득 원을 그리며 굉장한 규모로 탑돌이 하듯 순례자들이 돌고 도는  사우디의 메카 성전이 떠올랐다.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거리엔 아직도 식민지시대의 냄새가 났다. 거리를 걸으며 프랑스의 고소한 에스프레소 냄새를 분간할 수 있었다. 같이 간 영국인은 매크럴(고등어) 냄새가 난다고 했다. 과연 냄새에 예민한 영국인이었다. 하지만 난 커피향내와 더불어 가까운 바다의 소금기가 묻어나는 질서없는 거리가 좋았다. 뜨거운 태양에 소금기도 건조되어 카사블랑카는 빛이 나는가보다 생각도 했다. 사실 영국인의 후각은 이성적이고 정확했다. 카사블랑카엔 고등어 통조림 수출산업이 발달해 곳곳에 통조림을 만드는 공장이 있고 했다. 그러나 카사블랑카 거리의 카페 곳곳에는 커피나 모로코 특유의 민트 (Mint Tea)를 마시는 사람이 많았지 고등어 통조림을 따는 사람은 못(?) 보았다. 수염을 길게 기른 산신령같은 노인분들이 삼삼오오 탁자를 둘러싸고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다 남자분들이었다. 다른 이슬람 국가에 비해 개방적이라 들었는데 또 카사블랑카는 대도시임에도 카페안에 여자분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꽁꽁 숨었을까? 집안에서 부침개를 부치고 있나? 명절날 파전 부치는 대한민국의 씩씩한 아줌마들이 떠올랐다.



겨우 몇시간 바다를 보지않았는데 다시 확 터인 넓은 바다가 그리웠다. 다시 카사블랑카의 해변으로 돌아왔다. 대서양이 보일 법한 2-3층 높이의 레스토랑을 찾아가 점심을 먹었다. 이곳에서 잘한다는 해물튀김같은 것을 주문했다. 싱싱한 레몬과 같이 나온 해물튀김은 시각과 후각 양 감각을 만족시켰다. 대부분 멸치에다 튀김가루를 입히고 튀긴 것이었고 거기에 오징어와 새우튀김도 같이 있었다. 그리고 같이 간 사람들의 탄성으로 청각까지 첨가했고 먹어 본 결과로 미각까지 만족스러웠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먹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말이다. 고등어 비린내는 어디로 실려갔는지 고등어냄새 난다던 그 영국인도 타타르 소스에 찍은 해물튀김을 사각사각 씹으며 즐거워 했다. 레스토랑이 있는 건물은 호텔인지 바로 아래로는 수영장이 바다쪽을 향해 있었고 그 너머로 반짝이는 대서양이 펼쳐졌다.



카사블랑카는 보기완 다르게 오감을 만족시키는 곳이었다. 바다가 있었고, 해변이 바다와 도시를 구분하고, 거기에 역사의 흔적이, 대형 모스크가 있었고 낭낭한 기도소리가 항상 있었다. 다시한번 영화 카사블랑카의 대사가 기억났다.


“항상 파리에 있음을 기억해요(We'll always have Paris).”



‘릭’은 떠나는 ‘일사’를 용서한다. 사랑하기에 견딜수없는 이별 그렇지만 자신을 떠나는 일사를 놓아준다. 그가 그녀를 계속 사랑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녀와의 행복했던 시간을 망각하지않기위해 행복한 기억이 있는 파리를 잊지말라고 한다. 이쯤되면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는 사람이 없다. 대한민국 명절에 전 부치랴, 일가 친척 손님 맞으랴 눈코 뜰새없이 바빴던 대한의 아낙네들도 일손놓고 않아 이 장면을 보며 눈물을 그렁거렸을까? 파리에서의 행복한 기억들이 그들에게도 있었을까? 명절 부침개의 식은 기름처럼 느끼한 이런 장면에 지금에야 누구하나 눈깜짝하랴 만은 한때는 14인치 텔레비전 스크린에 눈박고 미지의 이국 땅 카사블랑카, 문자 그대로 마음속의 ‘하얀 집’을 새겨넣었으리라...



그러나 이 억지(?) 낭만의, 꿈의 공장에서 생산된  허구의 카사블랑카, 또 유럽인과 미국인의 카사블랑카를 벗어나면 조금은 다르게 이 도시의 실제 주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카페에서 보았던 모로코 산신령들의 깊이 패인 주름에서 결코 실제 삶이 녹녹치 않음을 눈으로 느낄 때, 부침개를 휙휙 부치며 땀이 송송 쏟던 건강한 팔뚝의 대한의 아낙네들이 머리속에서 느껴질 때, 모로코 가이드가  프린트한 모로코 시인의 시를 내게 건냈다. 그리고 이 시를 소리내어 낭송했다, 대서양을 바라보며… 해물튀김을 배부르게 먹고 난뒤 졸음이 눈꺼풀까지 올라 올 즈음에 낭송한 시였다. 빈 해물튀김 접시가 아직 치워지지 않은 테이블 위에 민트 티가 놓여있었다. 낭송된 시는 카사블랑카의 시인 아흐멧 바라캇(Ahmed Barakat)의 시였다. 그는 카사블랑카에서 나고, 자라고, 공부했으며, 이곳에서 직장을 다녔다. 카사블랑카는 이 시인에겐 그의 시세계 전부였다. 그리고… 그리고 겨우 34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고 한다. 소월처럼, 이상처럼… 또 기형도처럼. 이 시인의 요절은 모로코의 모든 시인들이 같이 죽음을 경험했다고 할만큼 충격이 컸다고 한다.



‘작은 한마디’

         -아흐멧 바라캇


시장으로 갈래

올때까지 제발 기다려 줘

지루하면 옷을 빨수도 있잖아

그리고 문이 귀찮게하면

떼 내버려

그리고 아무거나 문가에 둬

제발 네 얼굴을 거울에 남기지 말고

창가로 가

자살하지마

네 습관처럼


그러나

기다려

날 위해

그때까지

내가 올


§



‘A small word’

        -Ahmed Baracat


I am going to the market

Please wait till I come back

You can wash your clothes if you get bored

And if the door disturbs you

Take it off

And put anything in its place

Please don’t leave your face inside the mirror

And then quit by the window

Don’t commit suicide as is your habit


But

Wait

For me

Till

I come back


(© Translation: 2004, Norddine Zouitni)


이 파격적인 시를 읽으며 졸음이 금방 가셨다. 여기서 말하는 ‘창’은 무엇일까? ‘습관'은 또 무엇일까? 대서양을 다시 보았다. 요절한 시인이 매일 보았을 그 똑같은 대서양이었다. 거기에 답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대서양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게'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Magnum Silencium.
오직 이 대사만 침묵속에 반복해서 들려왔다.


“항상 카사블랑카에 있음을 기억해(We'll always have Casablanca).”


https://brunch.co.kr/@london/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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