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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Oct 18. 2017

폐허에서 역설적 에너지를 얻다

모로코 여행 에세이- 로마 폐허 유적지, 볼루빌리스

문학사와 예술사에서 18세기 유럽은 조금 특별한 시기였다. 시인들과 예술가들은 세상을 그전과 다르게 보려했고 느끼고자 했다. 특히 예술의 영감을 지나간 과거에서 찾았고 지난 세월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가 약간 지나쳐 현세보다 내세, 현재보다 과거를 미화예찬하였다. 이 ‘과거사랑’은 영국에서 특히 많이 발견된다. 과거의 향수에 집착한  영국귀족(aristocracy)들은 자신의 영지에다 인공으로 고대나 중세의 가짜  폐허(ruin)까지 만들어 즐겼으니 그 폐해가 좀 심했다고 할까? 이 가짜 폐허는 고대 신전, 무너진 비석들과 돌에 낀 이끼, 또 석고로 만든 고대의 가짜 벽돌까지 그들의 정원을 장식하였다. 당시 유명한 정원 디자이너였던 바티 랑글리(Batty Langley)는 직접 이런 고전시대(그리스-로마시대)의  폐허 정원을 유행처럼 조장하기도 하였다.


문학에서도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이런 멜랑콜리한 퇴폐성(?)을 옹호한 미학이론도 우세하였다. ‘비평의 요소(Elements of Criticism)’란 1762년 책에서 케임스 경(Henry Home, Lord Kames)이라 불리는 헨리 홈(Henry Home)은 진짜 폐허이든 가짜로 만든 폐허이든 폐허는 ‘완강함에 대한 시간의 승리(the triumph of time over strength)’라고 했고 또 ‘멜랑콜리하지만 기분 나쁜 사상은 아니다(a melancholy but not unpleasant thought)’라고 강조했다. 그는 에딘버러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데이비드 흄과 아담 스미스 등과 함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핵심 멤버였다. 후에 그의 영향으로  영국 낭만파 시인들은 시간이 할퀴고 지나간 폐허를 관조하며 그 폐허에 숨어있는 ‘역설적 에너지(a paradoxical energy)’를 발견하려 하였다. 웨일즈와 잉글랜드의 경계선에 있는 옛 틴턴 수도원(Tintern Abbey)의 폐허를 시로 노래한 워즈워드와 미완성의 쿠블라이 칸(Kubla Khan)에서 서투른 이국적 환타지를 상상한 쿨러리지는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들은 폐허에서 시적이고 미학적인 성취를 추구하였다.


케임스 경이 말한대로 폐허는 정말 세월을 따라 변하는 물질적 세상에 대한 시간의 완연한 승리인지 알고 싶었다. 그 답을 위해서 약간은 퇴폐적이고 왜곡된 과거사랑이 나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무차별 쏘아대는 모로코의 햇빛땜에 이런 낭만과 퇴폐성을 끌어 낼 분위기도 기분도 아니었다. 모자로 얼굴을 푹 가리며  모로코 남서쪽 볼루빌리스(Volubilis)라는 로마제국의 폐허 유적지를 향해 걸었다. 낭만주의 시대 과거사랑을 자신의 넒은 정원에다 몸소 실천한 귀족들의 인공 폐허 정원과 낭만파 시인들의 음울한 시를 기억하려 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찬란한 햇빛이 눈부신 이 벌판에서 음울한 시가 기어나올 수가 없었다. 한때는 2만명이 살았다는 폐허 유적지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과연 낭만파 시인들처럼 과거와의 대화가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시인들처럼 폐허에서 역설적인 에너지를 충전시킬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그 에너지가 부족하다면 유적 곳곳에 숨은 과거의 신비를 초등학교 소풍 때 하던 숨은 보물찾기처럼 한가지 한가지 찾아내 상을 받을 수 있을까? 머리가 뜨거운 태양열에 달구어 점점 더 복잡해지자 이것저것 다 제쳐두고 이제 가짜가 아닌 진짜 폐허를 본다는 편안한 마음만을 갖기로 했다. ‘옛 터’라는 낭만적인 우리말과 고대유적이라는 약간은 먹물이 튕기는 말이 동시 혼재하였다. 이 로마제국의 버려진 폐허는 아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경계가 된 하드리아누스 장벽이 로마제국 최-북서쪽 변방이라면 이곳은 아마 최-남서쪽 변방일 것이다. 이 거대한 제국의 멀고 먼 변방에 볼루빌리스(Volubilis)라는 발음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세계제국의 폐허가 허허 들판에 2천년을 그렇게 남겨져 있었다.


제국의 센터 로마에서 먼 외지인 이곳에 뭐하러 이런 도시를 세웠을까? 의문이 먼저 들었다. 큰 ‘대’자를 굳이 쓴 국호 ‘대한민국’ 출신이지만 결코 땅덩이 크기론 ‘소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로마제국의 거대한 영토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변방도시 볼루빌리스라 했지만 이 도시는 한때 당당히 북아프리카 모리타니아(Mauritania)라는 나라의 수도로 출발했다. 그리고 거대한 로마제국의 변방으로 편입되었고 로마가 물러 간 한참 후에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가를 탄생시킨 이드리스 1세(Idris I)에 의해 계속  수도로 번성하였고 그 왕가의 창시자인 이드리스 왕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몰리 이드리스(Moulay Idris)라는 곳에 묻혔다고 한다. 그렇게 권력가와 세도가들은 시간을 이기지 못했고 그 흔적만을 남겨 놓았다. 패배의 흔적을...


어쨋든, 몰루빌리스 폐허는 로마제국과 관련이 깊다. 3세기에 모로코지중해를 장악하고 팽창에 팽창을 거듭한 로마제국의 끝자락으로 편입되었다. 42헥타르의 면적인 볼루빌리스는 기원후 2세기에는 인구가 약 2만명정도였을 거라 고고학자들은 추산한다고 한다. 2만명의 거점 변방도시가 이제 폐허가 되어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시, 시간에 패배한 흔적을 보러 멀리에서 사람들이 기꺼이 찾아 온 것이다.



기원후 285년경에 막강했던 지배자 로마인들이 이 도시에서 후퇴했다. 거대한 국에도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다. 지배자들이 떠나고 당시에 남았던 나머지 시리아인들, 유대인들, 베르베르인들과 그리스인들은 모두 한참 뒤에까지 지배자의 언어인 라틴어를 공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여행가이드의 흘러간 역사 요점정리에 놀란 건 이 먼 외진곳에 지중해 북쪽 로마인과 그리스인 뿐 아니라 동쪽의 시리아인과 유대인도 있었다고 하니 볼루빌리스는 당 국제도시로 손색없었다. 도합 2300년 역사를 품은 이 폐허의 신비한 베일을 벗기려 프랑스 식민지 고고학자들은 19세기 들어서야 이곳에서 발굴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발굴된 현장은 거의 로마제국 시기의 흔적이 대부분이지만 그 뒤를 이은 그리스도교 시기와 이슬람-아랍시기의 흔적도 이곳에서 같이 볼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거주는 로마인들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었음이 증명되었다. 가아브 평원(Gharb Plain)이라 불리는 모로코의 넓은 들판에 들어선 이 유적지는 사실 로마제국뿐 아니라 리비아, 무어(Moor), 퓨닉(Punic), 아랍-이슬람 문화가 로마와 그리스도교 문화와 함께 혼용된 곳이기에 그 역사상 또 문화상 가치가 높아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고적 물품중에는 로마제국의 선진문화와 지역문화가 혼성된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하며 그래서 세계문화유산 지정의 중요 이유가 되었다. 이곳에서 가까운 몰리 이드리스 제룬(Moulay Idriss Zerhoune)이라는 도시에서도 보이는 볼루빌리스는 모로코의 다른 도시인 페즈( Fez)와 멕크네스(Meknes)사이에 위치해 모로코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유적지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번영과 찬란한 역사를 뒤로하고 11세기 이후 약 1000년의 세월을 볼루빌리스는 변방의 외딴 벌판에 버려졌다. 사람들은 떠나고 빈집들만 남았다. 주인떠난 빈집에 귀신들이 살았을까? 아님 모로코 들판의 야생동물들이 빈집을 차지했을까? 흥망성쇠라는 말은 사실 시간에 무릅을 꿇었다는 말이다.  대신 1000년의 세월동안 인적없는 폐허였기에 당시의 흔적대로 남을 수 있는 이유가 되었고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당시 흔적의 냄새를 맡으며 소위 ‘관광’을 하는 것이다.


먼저 이 유적지를 걸어들어가면 놀라운 것은 ‘데카마누스 막시무스(Decamanus Maximus)’라 불리는 로마시대 대로였다. 이 대로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보듯 중요한 행진 의식(Ceremonial)의 장소로 쓰였다고 하며 대로 양 옆으로 조막조막한 상점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약 천년을 볼루빌리스는 사람들이 살지 않은 빈터로 남았지만 몇몇 건축물들은 아직도 옛모습을 어렴풋이 보여주며 서 있었다. 그중에 공공건물이었던 주피터 신전이 있는 곳은 이곳의 중심이었다. 거기에 또 바실리카도 있었고 공공 토론장격인 포럼(Forum)도 있었다. 바실리카는 아치형 문을 낸 벽들이 볼만했고 세월을 견디며 그대로 서 있는 고린토 양식의 기둥들이 멋있었다. 학집이 높은 고린토 기둥위에 있었고 한마리의 학이 또아리를 틀고 여행자들을 내려 보다가 또  하늘을 올려보기를 반복하였다. 또 이곳에서 볼수 있는 로마 세도가들의 집터와 대 옆에 선 상점들 그리고 공동 목욕탕의 흔적들은 푯말로 표시해 놓아 쉽게 찾고 읽을수가 있었다. 와인 프레스 도구와 올리브를 짜는 도구도 보였다. 갑자기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올리브 기름대신에 모로코 들판에서 불어왔다. 빈터로 남은 동안 문화재 도굴꾼들과 지역민들이 폐허의 건축물 대리석 조각과 벽돌을 훔쳐갔지만 아직도 당당히 서있는 중앙대로 끝에 선 개선문(the triumphal arch)은 형태가 그대로 남아 볼만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굴된 옮길 수 있는 많은 유적품들은 보존을 위해 모로코의 수도인 ‘라밧'의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꼭 보아야하는 것은 로마제국시기 집 바닥에 붙박은 타일조각 모자이크이다. 대부분 그리스-로마 신화를 모티브로 한 것들이었다. 곳곳에 보이는 귀족들의 집과 독특한 집안안의 모자이크 조각은 당시 세력가들의 독특한 취미와 향락을 즐긴 중요한 증거들이었다. 또  볼루빌리스에서 재미있는 것은 주인떠난 빈집에 그 집주인 이름을 알수 없기에 집 바닥의 모자이크 주제로 그 집 이름을 명명해 놓은 것이었다. 개선문  가까이에 있는 운동선수(the Athlete)의 집 모자이크 조각은 재미있고 유머감각이 뛰어났다. 또 서커스를 하는 모습을 담은 익살스런 모자이크도 있었고 오르페우스의 집(the House of Orpheus)이라 명명된 곳도 있었다. 여러 집 모자이크 중에서 가장 화려한 것은 비너스의 집(the House of Venus)이라 붙인 곳이었다.


폐허의 도시에 키가 장대같이 큰 사이프러스 나무가 서 있었다. 이 나무 폐허의 고적과 잘 어울렸고 거기엔 생명과 죽음을 각각 상징하듯 했다. 그리고 이상하지만 삶과 죽음이 서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너져 내린 고린토식 기둥에 걸터 앉아 당시 살았던 볼루빌리스 시민들을 상상했다. 헐렁한 토가를 걸치고 샌달을 질질 끌며 골목을 걸었을 그들, 라틴어를 쓰며 가끔 베르베르 단어를 섞어 사용했을 그들이었다. 멀리 제국의 수도에서 하달되는 명령에 귀기울이 제국의 다른 변방 소식도 들었으리라. 공중 목욕탕에 주르르 몰려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서로 가십을 즐기며 낄낄거렸을 것이다. 훗날 제국의 변방이 또다른 제국의 중심이 되어 그 귀족들이 가짜 폐허를 만들며 과거사랑에 집착했을 때 이곳 변방 모로코의 외진 폐허엔 공중을 나르던 새들만이 잠시 쉬어가던 곳이 되었다. 폐허에서 역설적 에너지를 얻는다는 영국 낭만파 시인들의 발상은 사실 정밀한 과학인 고고학적 발굴이 아니라 고고학이 발견해 낸 터전위에다 시인의 상상력을  덧붙인게 아닐까? 바이런이 그리스를 떠돌고 이태리를 방랑했던 이유도 단지 답답한 영국이 싫어서 떠난 것뿐 아니라 이런 고대의 폐허에서 안식의 에너지, 즉 삶의 지혜를 발견했던 건 아니었을까? 또 그들이 폐허에서 발견한 지혜는 무엇일까? 힘이 빠져 앉아 쉬던 무너진 폐허의 돌계단이 뜨거웠다. 오후의 햇빛에 눈이 스르르 감기며 낮잠의 시간임을 알려주었다. 케임스 경이 말한 인간의 완강함(strength)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시간의 승리(the triumph of time)’라는 진리에 복종하는 마음으로서만 역설적 에너지를 얻는다는 역설을 깨닫자 눈이 번쩍 뜨였다.


https://brunch.co.kr/@london/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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