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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Nov 10. 2017

도자기 교류사, 그리고 가톨릭 사제?

런던 에세이

파리 기메 박물관의 중국 도자기

유럽 대부분 박물관엔 중국과 일본의 옛 도자기를 볼 수 있다. 이런 바다 건너온 동양의 도자기들은 귀족들이 살던, 지금은 일반인들에 개방된, 성이나 대저택에도 많고 방 곳곳을 채우며 전시되어 있다. 식탁위에 놓여 있어야 할, 아니면 집안 찬장안에 있어야 할 실용적인 자기들도 애지중지 하는지 벽에 멋지게 걸어놓아 그림처럼 감상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곳도 많았다. 파리의 빅톨 위고 생가엔 방 한곳을 온통 중국 도자기로 가득 채워 놓았다. 그뿐 아니라 일반 영국인 가정에도 가구 위 또는 벽난로 위에 중국식 도자기지만 영국에서 생산된 보통 백색을 배경으로 청색으로 동양화가 그려진 식기(blue and white pottery. 청화 青花)를 보물처럼 전시해 놓고 있었다. 역사 교사서에서 배운 ‘무문토기’나 ‘빗살무늬토기’로부터 터너상(Turner Prize) 수상자인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의 자기까지 인류역사와 함께 한 도자기는 단순한 일상용품에서 벗어나 엄연한 예술품으로까지 격상되어 취급받고 있다.



16세기 유럽에 불기 시작한 중국도자기 열풍은 18세기에도 계속되었다. 당시 유명작가이자 언론인이었고 또 ‘로빈슨 크루소의 표류기’로 잘 알려진 다니엘 데포(Daniel Defoe)는 이렇게 말했다. “방 가구위에도, 접이 책상위에도, 벽난로 위에도 중국도자기를 천장 가득 쌓아두는 것,...너무 많아 골치거리가 될때까지(...piling china up on the tops of cabinets, escritoires and every chimney-piece, to the tops of the ceilings… till it became a grievance).”라고 하며 유럽 상류층이 중국도자기 수집에 열광임을 조금은 과장된 그의 말로 보여준다. 이로써 도자기 보유는 당시 그 집안의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음도 알수 있다. 수백만 달러의 미술품을 집에 소장하는 현대의 갑부들과 비슷할 것이다. 당시 도자기는 인기만큼이나 비싸서 ‘백금(white gold)’이라 불리며 인기를 누렸다. 왜 영어로 ‘China’라고 하면 나라 이름뿐 아니라 자기 이름 자체가 되었는지 이해가 간다. 유럽 상류층의 중국 도자기 열풍은 19세기 후반 일본풍의 원조인 ‘우키요 에’민속화 열풍 훨씬 전의 일이라 몇백년전에 이미 동양의 미를 발견하고 감탄한 유럽인의 안목 또한 놀랍다.



16세기에 시작된 중국도자기 수집 열풍에도 진작 17세기 초반까지 이 신비한 도자기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 유럽인들은 전혀 몰랐다. 유럽의 왕가나 귀족 등 상류층은 그저 비싼 값을 경쟁하듯 치르고 수집했을 뿐이었다. 이 신비한 도자기의 빛깔과 감촉, 매끄러운 표면에 그려지고 새겨진 이국적 풍경은 거칠고 투박한 유럽의 질그릇이 절대 따라 오지 못할 우아하고 세련된 동양미의 총결정체였고 그래서 유럽인들의 도자기 제조법 획득에 부채질을 하였다. 이 비법만 알면 당시 신대륙 발견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이 확고해진 유럽에서 ‘엘 도라도’가 될 수있는 건 뻔한 이치였다. 그러나 이 신비의 도자기 제조비법은 베일에 쌓여 있었고 또 중국의 중요 수출품이라 엄격히 관리하며 새어나가는 걸 방지하고 있었다.



“이 엄격한 보호관리를 뚫고 비법을 감히 훔친자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이 사람은 프랑스인 예수회 선교사제였다. 역사에서 중요 산업스파이 중의 한명으로 기록될 이 프랑스 신부는 ‘인홍슈(殷弘绪, Yin Hongxu)’라는 멋진 중국식 이름까지 가지고 있었다. 본명이 ‘프랑소와 사비에르 당트르코예(François Xavier d'Entrecolles)’란 이 예수회 사제는 1664년 프랑스 중부 리옹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세의 어린 나이인 1682년 예수회에 입회했고 신학교육을 받은 7년 뒤 1689년 중국에 당도해 예수회 중국선교 맴버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쟝시(Jiangxi) 지방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프랑스 예수회의 중국 총장을 1706에서 1719년까지 역임하였다. 언뜻보면 평범한 선교사제인 그가 역사에 길이  그의 이름(?)을 남긴 건 수천년을 내려오던 중국 도자기의 신비로운 비법을 훔쳐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역사에서 첫번째 산업스파이라고 할 수는 없는 듯하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고려말 문익점(1329-1398)이 목화씨를 붓뚜껑에 넣어가지고 온 농업스파이도 있었고 더 멀리 6세기 경에는 중국비단의 비법을 알기위해 당시 로마제국은 수도사를 중국으로 파견했으며 문익점처럼 대나무에 누에고치를 숨겨 밀반출했다는 사실도 있다. 지금은 중국인 유학생이나 기술자들이 서구나 일본의 첨단기술을 빼내는 게 자주 신문에 보도되지만 중국은 사실 역사적으로 기술을 빼았겼던 나라중의 하나였다. 또 의아한 것은 종교인인 수도사나 선교사가 이 스파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윤리적 잣대로 보면 신문의 톱뉴스를 장식할 만한 일이지만 당시의 정경유착 그리고 정치와 종교의 밀접성으로 보면 그리 기절하며 놀랄일도 아니다.



당트르코예 신부는 1712년에서 1722년사이 약 10년간 중국의 도자기 산지이자 도자기의 상징도시처럼 된  징드젠(Jingdezhen. 또는 Ching-tê-chên)에서 강희(강시) 황제의 엄격 통제하의 중국도자기 비법을 몰래 알아내 편지로 그의 유럽본부 장상에게 보내는 걸 성공했다. 그로써 10년 사이에 쓴 그의 편지가 비밀로 엄격히 통제되던 중국도자기 제조공정의 비법이 유럽인의 손에 넘어가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그는 수시로 징드젠의 도자기 가마터를 방문해 관찰하고(몰래 했을 것이다) 또 중국 가톨릭 개종자들을 통해서도 교묘하게 비법을 알아내 편지에 고스란히 적어 유럽 본부 그의 장상에게 보냈다. 당시 프랑스에 있던 장상의 답장을 보면, 당트르코예 신부가 쓴 첫 편지로는 도자기비법을 완전히 파악 할수 없었던 것같다. 그리고 중국 징드젠의 산에서 채취하는 특별한 흙/또는 바위가 재료로 도자기 제조공정에 필요한데 그걸 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상은 아예 직설적으로 더 상세한 정보를 빼낼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10년간 계속해서 당트르코예 신부는 조금씩 알아낸 비법을 편지로 써 보냈다. 과연 그 장상은 스파이 지령을 내리면서 고백성사는 보았을까? 또 직접 스파이로 활동한  당트르코예 신부는 007처럼 능숙했었는지 아님 편지쓰는 손을 덜덜 떨며 노심초사하였을까? 어쨌든, 이들은 007영화의 제임스 본드와 그의 보스 M과 비슷한 관계이다. 하지만 그가 얻어낸 비법이 유럽 최초는 아니었다. 독일인인 뵈트거(Böttger)라는 사람은 이미 1710년에 이 도자기 제조 비법을 유럽에 전하였고 마이센 자기(the Meissen Porcelain)란 브랜드로 중국식 자기를 유럽에서 만들어 내고 있었다고 한다.

도자기 제조비법뿐 아니라 당트르코예 신부의 편지는 또 어떻게 중국인들이 누에를 기르는 지, 어떻게 조화(artificial flowers)를 만드는 지, 인공 진주(synthetic pearls)를 또 어떻게 합성하며 만드는  기록했다고 하니 과연 그는 전문적 산업스파이였다. 거기다가 어떻게 중국인들이 수은을 제조하는지까지 그의 편지에 명시되어있다고 하니 그가 본직인 선교사제의 임무를 제대로 했는지...?



당트르코예 신부의 스파이 편지는 후에 중국에 대한 관심을 유럽에 증폭시키는 계기도 됐다. 그 영향은 프랑스 백과사전파인 디드로(Diderot)의 백과사전(Encyclopédie)에도 서술되었다. 또 지금도 유명한 영국의 자기회사 ‘웨지우드’ 브랜드에 자기 이름을 남긴 조사이아 웨지우드(Josiah Wedgwood)는 이 당트르코예 신부의 비법을 열심히 탐독하고 아예 그의 책에 카피했다고 한다. 가볍고 투명한 웨지우드 자기를 보면 이 당트르코예 신부에게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후엔 말라키 포슬스웨이트(Malachy Postlethwayt)의 '무역과 상업의 세계사전(Universal Dictionary of Trade and Commerce. 1757–74)’에도 직접인용없이 이 프랑스 예수회 사제의 편지글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 예수회 선교사제의 스파이 이야기에서 보듯, 서구식 역사교과서로 유럽의 선교사들이 보다 발달된 유럽 르네상스 과학을 일방적으로 중국에 가르쳤다고 서술되지만 사실은 ‘쌍방향 영향’이 더 정확한 것같다. 그래서 윈스턴 처칠이 말한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 임이 맞고 그게 현실이지만 이 기록된 역사를 비판적으로 볼 눈도 가져야하지 않을까? 그러나 현대의 윤리적 잣대로 역사를 평가해서는 안되며 또 흑백으로 답이 나올 사안도 사실 아니지만 다양한 측면에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 정치와 문화의 관계 그리고 특히 종교의 역할에 대해 꼼꼼히 살펴야 하지 않을까?



당시 유럽에선 당트르코예 신부는 영웅이었을 것이다. 반면, 중국인들에겐 그는 도둑질을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슬아슬 쓰릴 만점의  ‘스파이질’었는지, 아님 ‘도둑질’이었는지는 같지만 또 다르다. 어느쪽에서 해석했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도둑질을 했든, 멋진 스파이로 이중적 삶을 살았든, 무척이나 바빴을 당트르코예 신부는 1741년 베이징에서 이 세상 마지막 잔을 마시고 잠들었다. 그리고 약 100년 뒤 1839년 아편전쟁이 터졌다. 중국 측에서 보자면 도자기 비법을 잃었나중에 아편을 수입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유럽 곳곳에 멋지게 전시된 도자기들을 보며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감탄해야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의 흔적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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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도서


*William Burton's Porcelain, It's Art and Manufacture, B.T. Batsford, London, 1906.

당트르코예 신부의 편지

빅톨 위고 생가의 중국 방. 촘촘히 벽에 걸어 놓은 자기들이 보인다.

모로코 페즈의 자기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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