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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Dec 13. 2017

요르단 강에서 과거를 씻어내고...

이스라엘 성지순례-요르단 강

"어쩌자고 당신들은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고약한 곳으로 데려왔소? 여기는 곡식도 무화과도 포도도 석류도 자랄 곳이 못되오. 마실 물도 없소." (민수기 20:6)


이집트에서 노예처럼 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지도하에 한많던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향했다. 어려움속에 출발한 약속의 땅으로의 순례, 그러나 광야의 생활을 겪으면서 선조의 땅 '가나안'으로 진전할 때, 고난과 역경을 참아내지 못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 놓았다.



‘왜 우리를 여기로 데려 왔습니까?'



노예로 취급받고 차별받던 때는 깜박 잊어버렸다. 그리고 허허벌판 광야에서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노예같은 생활도 현재 경험하는 역경과 고난보다 낫다고 스스로를 쇠뇌하며 과거를 색칠하였다. 그땐 차별받았지만 지붕아래 잠을 잘 수 있었다. 참기 어려워진 그들은 불평의 화살을 모세에게 마구 쏘아댔다.


예루살렘에서 요르단 강으로 가는 길은 사막이다. 물도 풀도 나무도 없는 황량한 사막이었다. 그게다가 이곳은 해수면보다 몇백미터 낮은 지대이다. 가끔 베두인들이 쳐 놓은 텐트를 보았다. 이스라엘 민족도 광야에선 저렇게 살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양무리들이 황량한 산비탈에 보였다.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 너머는 거의 사막지형이다. 성서의 땅, 그 지형은 성서에 적힌 말씀처럼 신비하고 오묘하다. 온갖 지형이 이 좁은 국토에 다 있다. 사막과 비옥한 옥토가 함께... 북에는 민물인 갈릴래아 호수 남에는 죽은 소금의 바다 사해가 있고, 그 사이를 연결시키며 흐르는 요르단 강이 있다. 자유가 없던 노예의 시절과 자유는 있지만 참기 어려운 역경, 그 사이에는 상징적인 요르단 강이 흐르고 있었다. 삶과 죽음 사이 그 요르단 강… 그래서 강 이편과 강 저편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과 광야를 가른다. ‘아제아제바라아제’의 뜻과 같다. 요르단 강 저편은 ‘피안’이다. 강은 물리적으로 이 경계구분을 뚜렸이 한다. 바로 거기에서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경계선에서… 그래서 세례란 거꾸로 돌리는 것이 아닐까? 갈릴래아 쪽에서 내려오는 요르단 물줄기는 사해로 흘러간다. 세례는 이 사해, 죽음의 바다에서 생명의 갈릴래아 바다로 물줄기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명심하자. 세례 받기 전과 후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아니, 반드시 달라야 한다는 것을. 세례는 옛생활의 죽음으로부터 새생활로 부활하는 것이다. 죽음없이 부활은 없다.



영어 표현인 "옛 좋은 시절"을 뜻하는 "the good old days"는 광야생활에 대한 불평불만의 이스라엘 민족과 비슷한 심리적 상태를 말해준다. 그러나, 옛날이 그렇게 다 좋았을까?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정말 ‘지금 현재’가 참기 어려워 심리적으로 옛 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것은 아닐까? 무의식중에 ‘향수’는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


(왜 유신의 캄캄한 어둠을 경험한 세대들은 박근혜를 찍었노? 그녀의 아버지 땜에 이제 밥묵고 살만하 그랬나?)

(최순실 게이트를 경험하면서 왜 많은 이가 노무현 대통령을 다시 떠올리노? 노무현 시대는 "그렇게 다" 좋더나? 그라모 이를 이용해 지금 자기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은 "혹시" 없나?)


옛 시절을 미화하는 우리의 심리상태는 가끔 미래지향을 방해한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굳건한  믿음과 리더십이 필요하지 않을까? 군대생활 얘기를 자주하는 남자들은 군대로 다시 가라고 하면 안간다. 광야에서 모세에게 불평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겐 옛시절 향수는 노예의 속박마저 망각하게 만들어 버린다. 무섭다…, 과거가 미화되는 우리의 심리. 일본 우익들의 과거 향수, 영국의 UKIP 당원들의 대영제국 영광의 향수, '미국의 영광을 다시'라는 구호에 혹해 트럼프를 꾹 찍어버린 미국 시민들은  옛 시절 향수에 취해 알게 모르게  "과거미화"에 동참했다. 샤넬 No. 5보다 더 강한 ‘과거 향수’의 향이 퍼지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경험과 같이 "현실 불만족"이 그 근원이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봐야지 은연중 ‘좋은 시절(the good old days)'만  떠벌리는 자들은 과거 미화뿐 아니라 미래조차 망각한 자들이다. 약속의 땅은 그들에게 멀기만 할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 모세처럼 굴하지 않고 '약속의 땅(the Promised Land)'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말자… 그래서 흙탕물 요르단 강에서 세례때 약속상기와 갱신은 계속되어야 한다.


http://www.brunch.co.kr/@london/127

http://www.brunch.co.kr/@london/134

http://www.brunch.co.kr/@london/138


강이라 하지만 큰 시냇물 정도이다. 더구나 이곳은 지류라 강폭은 더 좁다. 이쪽이 이스라엘이고 저쪽이 요르단 영토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마태오 3:13-14


강물도 그렇게 깨끗해 보이지 않는다. 가까운 곳이 사막이다. 그래서 이 흙탕물조차 거룩해 보인다.

요르단 강 들어가는 입구.

말한대로 요르단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항상 이스라엘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다. 찾아오는 많은 순례자들과 같이 사진도 같이 즐겁게 찍어준다. 매번 분쟁이 많이 발생하는 곳에 배치되지 않은 이 이스라엘 병사들은 행운이다. 하지만 군대간 아들(그리고 딸)을 걱정하는 엄마들은 이스라엘이나 한국이나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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