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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Mar 12. 2018

어머니의 날에 "엄마, 밥줘"를 외치다...

수선화, 사랑, 헌신 그리고 어머니


오늘은 영국에서 ‘어머니의 날(Mother’s Day)’이다. 어머니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희생에 대해 감사하고 기억하는 날이다. 세상에 어머니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을 외면하는 이는 많다. 많은 이들은 이맘때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수선화를 보며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래서 수선화를 꺾어 어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풍습도 생겼다. 올해 아카데미 상을 받은 ‘게리 올드만’은 수상소감에서 ‘(엄마), 주전자 물 올려놔(Put the kettle on)”라 했다. 나와같이 뉴스를 보던 사람들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아마 이 소감을 듣는 즉시 모든 영국인의 가슴이 잠시 따뜻했을  것이다. ‘주전자 물 올려놔’는 ‘홍차(또는 커피) 마실래’와 같은 뜻이다. 특히 영국적인 표현인 이 관용구는 일상어로 가깝고 편안한 사람들 사이에 친근하게 쓰는 표현이다. 그래서 명령하는 명령문같지만 이 표현속에 신뢰와 포근한 ‘정’도 묻어있다. 한국말로 ‘(엄마), 배고파. 밥줘’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어머니앞에선 누구나가 응석받이가 되고 싶어한다. 아이든 어른이든. 이제 99세가 되는 늙으신 어머니께 감사하며 게리 올드만은 그의 오스카를 어머니께 올렸다. 크게 성공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요구하는 칭얼거림은 ‘(엄마), 차한잔 줘’였다. 효자들은 어머니께 요구하는게 고작 ‘차 한잔’이다. 이 한마디로 그가 얼마나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으레 짐작할 수 있다. 여러번의 이혼경력으로 어머니의 속께나 썩였를 이 명배우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특히 알콜중독자이며 가정을 버린 아버지 몫까지 대신해 키워준 어머니께 애착도 많이 갔을 것이다. 한편, 영국의 일반 가정을 제외한 귀족이나 억만장자들, 특히 영국 왕실 가족은 어떨까 잠시 상상해 본다. 그들의 가정사를 경험못해봤고 알지못하지만 과연 찰스 왕세자는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엄마, 주전자 물 올려놔’를 한번이라도 말했을까? 했다면 과연 편하고 친근한 마음으로 했을까? 혹시 여왕은 많은  시종들에게 차한잔 갖다주라고 시키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호기심이 발동하자, 과연 여왕은 자녀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줄까?까지 갔다. 물론 여성들이 가사 노동자로만 인식하는건 잘못이지만 혹시 이런 따뜻한 가족간의 의식(ritual)을 여러 사정으로 높으신 분들의 가정에선 삭제시키는 건 아닐까? 어쨋든, 어머니의 사랑으로 이런 가정의식없이도 사랑만으로 충만된 가정을 이루었으리라 가정한다.



자랄 때 어머니의 영향은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 과장하자면) ‘절대적’이다. 그게다가 아버지가 난폭하다거나, 가부장적이거나, 또는 가족을 버린 가정의 경우 대게 어머니의 고통과 헌신이 동반하며  그래서 자라는 자녀들에 큰 영향을 주게된다. 이런 경우 심리적으로 일반적인 어머니와의 관계보다 더 특별한 관계를 형성시킨다. 또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보다 좀 더 특이해 보인다. D. H. 로렌스의 소설 ‘아들과 연인’이 이 경우를 잘 보여준다. 어쩌면 이 소설의 어머니처럼 아들에게 ‘올인’하는 어머니는 아들의 삶을 구속시켜 결코 자유롭고 독립적인 성인으로의 성장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며느리의 삶이 고달픈 경우가 많다. 고부간의 갈등도 여기서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들을 자기 소유에서 독립시켜 내어주는 대범한 사랑이 필요하다.



모자간의 특별한 관계속에, 특히 어머니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많다. 아일랜드 작가인 ‘존 맥가헌’의 경우도 그렇고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필립 라킨’의 경우도 그렇다. ‘더 히스토리 보이스(The History Boys)’란 연극을 쓴 작가 ‘알란 베넷’도 어머니와의 보통적 관계보다 더 가까운 관계였다. 아들이 이를 눈치채든 못채든 간에, 의식하든지 아님  무의식으로 아들 정신속에 누적되었든, 어머니가 아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지독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아들들은 성년이 되서도 또 심한 경우는 어머니의 사후에도 어머니의 독재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든 경우도 종종있다. 한편, 매사에 예민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극도로 발전한 유명 예술가들이나 문인들의 경우에는 그들 어머니의 영향과 관계가 그들의 창조적(creative)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긍정적 구실도 한다.



이스라엘 소설가 ‘아모스 오즈(Amos Oz)’의 자전적 소설인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는 어린 아모스의 눈으로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의 고독과 고통을 세세히 관찰경험한다.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그런 어머니가 애처로와 죄의식을 함께 보탠 무한정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의 속마음을 기록했다. 이 소설속에 어머니의 자살은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그는 다만 몇문장으로 평이하게 서술하고 대신에 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하고 예민했던 어머니가 들려준 수많은 일화와 이야기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고스란히 기록한다. 어떻게 어머니가 어린 아모스에게 들려준 그 이야기들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기억할 수 있었는지, 또 하얀 백지처럼 순수한 유대인 소년 아모스의 영혼에 들려준 그녀의 서사들이 어린 가슴에 뚜렷이 각인되어 소설가가 된 성년의 아모스가 그만의 독특한 서사문체로 술술 풀어냈는지를 생각하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자전적 소설을 쓰면서 또다시 어린 영혼 깊숙히 각인되었던 어머니와의 아픈 기억들을 되살려내면서 겪었을 아모스의 격한 고통과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도 문장 곳곳에 숨어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동유럽에서 쫒겨와 이스라엘로 올수밖에 없었던 당시 유대인들의 생생한 실상과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서 연약하고 문학적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살아가면서 받았을 예리한 충격, 그게다가 생판 다른 세계인 중동의 이스라엘에서 가난과 그리움 그리고 일상의 참을 수없는 단조로움을 헤쳐나가야 했던 이 여인을 직접적이며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했던 것은 다름아닌 아들 아모스였다. 그렇다고 몇몇 다른 예술가나 문인들의 경우처럼 그의 아버지는 난봉꾼도 아니었고 가부장적이지도 않았으며 또 가슴이 냉한 사람도 아니었다. 아모스의 아버지는 여러모로 자상하고 가정적이었다. 아들의 기대가 꺾일까 몰래 매마른 정원에 식물들을 심어놓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는 ‘유약’했다. 성격이 우선 유약했고(선했고) 박식하고 똑똑했지만 다른 친척, 특히 큰 아버지와 비교해, 세속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학자였다. 어떻게 보면 이런  보통의 아버지가 어머니가 우울증으로 고생할 때 외출해서 다른 여자들을 만났던게 어린 아모스에겐 이해못할 일이었고 실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아버지보다 어린 아모스가 어머니를 훨씬 더 잘 이해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한 개인의 아버지라기보다 이스라엘에 정착한 동유럽이민자들의 세계 그리고 신생 독립국 이스라엘을 낳은 그 산고의 고통을 상징 것이다. 고통스런 개인의 가정사를, 고통스런 이스라엘의 탄생을 또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던 이스라엘에 온 초기 유럽 유대인 이민자들의 심적 육체적 고통을 담담하게 또 용기있게 드러내는 아모스의 소설에는 당연히 슬픔과 아름다움이 마구 뒤섞여 있다. 거기엔 사랑과 어둠이 함께있다. 그의 어머니는 갔지만 어머니가 들려준 많은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좁은 고대의 골목길 곳곳에 서려있었고 또 그 사랑의 흔적은 어린 아모스의 꾸불꾸불한 뇌속에 고이 저장되어 있었다.



개나리처럼 봄소식을 알려주는 수선화는 영국 방방곡곡에서 지천으로 피어난다. 꼭 일년에 한번 제철에만 사람들의 눈을 온통 사로잡으며 수선화는 피어나다 곧 사라진다. 봄소식을 알려주고 또 희망의 복된 뉴스를 색깔로 말하다 땅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감사도 혹시 한때 제철에 피었다 지고마는 수선화가 아닐까? 제철 아닌때엔 땅속 어둠속에 숨죽이며 인내하는 수선화의 뿌리는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같다. 가끔씩 마음을 둥둥 울려주다 떠나는 감상적인 이야기처럼. 이를 알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흙으로 덮어두는 우리 마음은? 개인적으론, 작가 아모스는 자전적 소설을 쓰면서 어머니가 못다이룬 어떤(?) 꿈을 대신 이루어 주었다고 확신한다. 총명한 유대인 여학생이 당시 독일과 폴란드의 명문대를 유대인이란 이유로 거부당한 뒤 체코의 찰스 대학에서 수학했던 불행한 시대의 신여성이었다. 똑똑했지만 ‘보봐리 부인’ 엠마처럼 결코 당돌하고 당차지 못했던 꿈많고 속으로만 삭이는 만년 문학소녀였다. 그리고 가난한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이자 성공하지 못한 학자로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 도서관에서 평생 사서로 일했던 평범한 남자를 남편으로 둔 아내였고 동시에 죽고 죽이는 일이 일상이던 혼돈 땅 이스라엘, 그 혼돈의 땅에서 아들을 지키는 빛의 어머니로 살아가야 했던 한때 유복했던 동유럽출신 유대인 여성이었다. 이 불행한 유대인 어머니는 숱한 짧은 이야기들을 아들에게 전함으로써 자신이 못펼친 꿈과 혼을 그에게 오롯이 불어 넣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분신이자 사랑하는 아들이 온세계에 수선화를 지천으로 피웠다. 아모스가 파워낸 수선화를 보며 그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리움과 죄의식을 동시에 가지며...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말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X무덤처럼 지독한 악취를 풍긴다 하더라도 모정만은 그렇지 않다(Whatever else is unsure in this stinking dunghill of a world a mother’s love is not.” 어머니의 사랑은 고귀한 헌신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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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중에서 어머니와 아들 아모스의 대화.



어머니: 만약 거짓말하는 것과 남을 모욕하는 것중에서 선택해야만 한다면, 관대하게 생각해서 결정해야 되.


아모스: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거야?


어머니: 가끔은. ‘사려깊음’이 ‘정직’한 것보다 나아.



Fania Oz: If you have to choose between telling a lie or insulting someone, choose to be generous.

Amos Oz: I'm allowed to lie?

Fania Oz: Sometimes... yes. It's better to be sensitive to be hon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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