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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Dec 27. 2018

웬디 수녀님, 그림속으로 들어가시다

런던 저녁


웬디(Sr. Wendy Beckett) 수녀님이 돌아가셨다. 그것도 세상의 빛으로 오신 구세주의 탄생기념일 바로 그 다음날에… 박싱데이(Boxing Day)란 희한한 이름을 가진 이날 오후, 검은 수도복 그대로 입은 채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박싱데이는 성탄절을 기념한 다음날 그리스도인들이 박스(Box)마다 가득 가득 사랑을 담아 이웃, 특히 사회의 약자들에게 전하고 나누는 날이다. 지금에야 이 박싱데이는 ‘세일’을 하는 특별한 날이 되어 시내 백화점들이 난리를 치는 날이지만 원래는 사랑과 자선을 되새기고 실천하는 날이었다.

웬디 수녀님은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미술사가이자 평론가이시다. 수도자로 특히 세상과 담을 쌓고 생활하는 수도복을 걸친 관상수도자이던 수녀님이 공영방송인 BBC에 등장해 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면서 뜻하지 않은 TV 셀레브리티가 되셨다. 그러나 수도자로서 그것도 관상을 하는 엄격한 은둔 수도자로서의 그녀의 삶엔 어디하나 흐트러짐 없는 맑고 향기로운 삶이었다. 영국섬 남동쪽 북해의 바람을 세차게 맞아야 하는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의 갈멜 수도원 숲속 캐러밴에서 홀로 그리스도의 삶을 따른 은둔자로 사셨지만 그 향기는 전세계 영어권 나라로 두루 퍼졌다. 수녀님이 매일 입으신 검은 수도복만큼이나 무미건조할 것같고 매마를 것도 같은 삶도, 길고 복잡한 예술사의 해박한 지식을 기반으로 수녀님의 깊은 묵상에서 우러나온 거장들의 작품해석을 대하면서 많은 이들이 그들의 삶에 영성의 커다란 울림을 경험했으리라. 그리고 수도자인 수녀님 자신은 예술 작품에 대한 자신의 가톨릭 신학적 성찰을 나눔으로써 세상과 교류하는 방식을 취하셨다. 그래서 바쁘고 지친 현대인의 목마른 삶에 예술과 문화란 성수를 가득 뿌려준 그야말로 박싱데이의 사랑과 나눔의 삶을 그대로 사신 수녀님이셨다.

수녀님은 올해 88세로 193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의대에 유학하자 영국으로 오셔서 축축하고 추운 그러나 문화의 향기가 일년 내내 풍기는 에딘버러에서 자라셨고 겨우 16세의 어린나이로 수녀원에 들어가셨다. 아이때부터 수도원에 가겠다고 다짐한 좀 괴팍한(?) 사춘기 소녀를 그녀 어머니는 이해했지만 아버지는 결코 이해못했다고 한다. 그 뒤 총명한 그녀를 알아본 수도원에선 수녀님을 옥스포드 대학으로 보냈고 이 유명한 첨탑의 도시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셨다. 졸업식날 그녀가 졸업증서를 받자 ‘반지의 제왕'을 쓴 당시 이 대학 영문학과 교수였던 ‘J.R.R 톨킨’이 갑자기 일어서서 박수를 쳤고 다른이들도 따라 박수를 쳤다는 일화도 있다. 같은 가톨릭 신자였고 자신의 아들이 신부였던 톨킨은 그녀가 tv셀럽이 되라란 걸 미리 알아보았을까? 그러나 그런 큰 청중의 박수에도 처음엔 수도생활에 필요한 일정한 경제적 수입을 위해 리버풀에서 또 고국 남아공에서 교사생활도 하셨고 라틴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하셨다고 한다. 그러다 건강이 안좋아 휴식을 취하면서 예술작품의 오묘한 신비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이 예술의 세계에 빠져들자 독학으로 예술사 전부를 두루 섭렵하셨다니 그 집념 또한 놀랍다. 그러다 우연히 한 전시회에서 작품설명을 하는 것을 본 BBC 제작자의 눈에 우연히 띄어 텔레비젼 예술프로그램에까지 나오신 것이었다. 검은 수도복으로 온몸을 걸친 속세떠난 수도자가 아주 세속적인 영국의 공영방송에 나왔으니 시청자들의 관심도 무척 컸을 것이다. 1990년대 한창 인기가 있을 무렵 수녀님의 BBC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25%나 되었다니 4분의 1이나 되는 영국인들이 시청했단 말이 된다. 그리고 수녀님이 항상 주장하셨듯 예술작품은 모두가 나누고 즐겨야 한다는 것을 파급이 큰 대중매체를 통해 효과적으로 실행하셨으며 그로인해 ‘케네스 클라크'와  ‘존 버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화계의 셀럽이 되셨다. 그 중에서도 ‘웬디 수녀의 오디세이(Sr. Wendy's Odyssey)’와 ‘웬디 수녀의 그랜드 투어(Sr. Wendy's Grand Tour)’가 가장 인기 있었다. (지금도 YouTube에서 수녀님의 명쾌한 작품해석을 어느때고 볼 수 있다.) 수녀님은 tv 촬영시에도 사전연습 하나없이 또  스크립트 하나없이 즉흥으로 하셨다고 하니 그 내공을 알만하다. 그리고 수도자의 신분으로 홀로 여행은 어려워 오직 책으로만 보아 온 유명 작품들을 직접 tv촬영을 위해 세계 곳곳의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그 실물 작품들을 대했음에도 그저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에서의 인기로 미국 방송에까지 진출하셨고 미국 시청자들과도 예술작품으로 교감을 나누셨다. 그러나 수녀님은 이런 속세의 인기에 결코 연연하지 않으셨다. 속세에서 돌아오면 항상 제자리, 자신의 본분인 수도자로 보금자리인 이스트 앵글리아의 숲속 작은 캐러밴으로 돌아와 세상과 간격을 두고 한적한 곳에서 가난한 은둔자의 삶을 사셨다. 우리나라의 법정 스님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맑고 향기나는 삶을 두분 다 사셨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박싱데이 자선의 전통처럼 박스속에 숨은 작품들을 꺼내 세상사람들에 보여주고 예술의 무한한 영성적 힘을 자신의 깊은 성찰로 꽃피워올린 수녀님은 그녀만의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비워내 주시고 평소 좋아하시던 그림속으로 걸어 들어가셨다. 수녀님이 스스로 자신에게 “Lucky Me…”하고 되뇌었듯 정말 축복받은 삶이었던 것같다. 왜냐하면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었기 때문이다.


May she rest in peace...





수녀님이 은둔자로 사셨던 작은 캐러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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