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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an 04. 2019

니체의 역설

런던 율리시즈

www.ny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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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키에르케고르에게 자유의지(free will)가 아주 중요하듯 ‘신은 죽었다'를 기세등등 외치던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에게도 의지(will)는 상당히 중요하다. 울트라 자본주의란 정글의 법칙에서 살아남고 권력(power)를 쟁취하기위한 그 ‘의지’말이다.  



니체는 먼저 인간을 알기위해 무엇이 인간을 동물과 다른지를 살펴본다. 그는 인간에겐 ‘결심(약속)을 할 권리(the right to make promises)’가 있지만 다른 동물엔 그 권리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이 권리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요소다. 이는 올해(현재)와 내년(미래)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에 따라 인간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비가시적인 ‘시간(Time)’’을 인지하는 촉수가 인간에겐 있으나 동물에겐 없다. 만약 그가 이 특별한 인간만의 기능을 더 연구해 파고들었다면 그의 ‘신의 죽음’이라 소리친 외침은 ‘신존재 증명'으로 혹시 변하지 않았을까? 하여튼, 시간과 결부시켜  ‘내년에도 똑같은 내가 되고 싶은’ 우리는 없다. 그러나 늙기는 싫은게 인간이다. 그러나 해마다 또 정확하게는 날마다 인간은 노화한다. 노화의 육체적 변화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노화에 대한 강한 거부감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은 많고 또 한편 그냥 지혜롭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머리는 희어지고 주름은 패이고 목소리는 탁해지고 관절염이 도지는 노화를 즐길 사람이 없음은 당연하다. 어쨋든, 직접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우리 몸의 작은 변화는 항상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의 정서(emotional)와 심리적(psychological) 정체성(identity)도 육체의 변화에 따라 동반적으로 변한다.



변하지 않은 것은 하늘아래엔 없다. 세상만사가 다 변한다면 변하지 않은 것도 분명히 있어야만 한다고, 그래서 모든것이 변한다면(움직인다면) 절대 변하지않는 그 첫번째 운동자(prime mover)를 상상할 수 있으며(존재해야만하고) 그리고 그 첫번째 운동자는 절대무변의 존재임을 역설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약 700년전에 그렇게 큰소리냈는데 니체는 귀가 있어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여튼, 니체는 변화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고 그걸 진리로 알아듣고는 그렇다면 어떻게 변할지는 그 아무도 모르기에 일종의 위기감과 두려움이 인간에게 엄습한다고 한다. 그래서 ‘새해결심’한다는 말은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an uncertain future)’ 모습에 대한 일종의 위로이며 보험이다. 이것은 또 현재 자신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애써 보호하고 지키려는 자연적 권리와 책임감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면 왜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은 이런 결심같은게 없을까(못할까)? 동물들은 자신들에 대한 고유한 개체적 개념이 없기 때문이고 각각의 고유한 정체성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니체는 보았다. 이런 면에서 니체는 중세의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동물보호자들뿐 아니라 심리학자들도 어떤 동물들, 특히 애완용 동물들인 개나 고양이들은, 죄의식(guilt)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동물들은 인간과 같이 단단히 결심했던 약속을 못지킨 치욕이나 부끄러움같은 것은 못느낀다. (그래서 가끔 동물들이 부러울 때도있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한(차별이 아닌) 니체는 인간이라면 또 인간이기에 결심(약속)을 하고 또 실행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동물과 동급이 된다. ‘짐승같은…’이란 말은 그래서 욕이다.



그러나 니체는 결심한 것을 꼭 지켜내야 하고 또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가끔은 상황이 변해 그 실행에 너무 많은 희생과 고통이 따를수도 있다. 물론 지킬수 있는 결심을 해야하지만 말이다. 오늘과 내일이 다르고 또 올해와 내년의 ‘우리’가 다르다. 우린 과거에만 계속 머물수 없고 또 미래를 위한 결심과 다짐만을 반복할 수도 없다. 오늘 지금 현재 위치한 자리가 그래서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나(self)란 항상 ‘유동적이고 자라고 또 변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위치에서 현재상황을 파악을 한 뒤 결심을 계획하고 실행해야 하며 그 실행이란, 낭만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현시점의 나(self)를 반복해서 없애고 변화시키는 행위, 즉 나를 죽이는 행위이다. 그래서 니체의 또다른 자아인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말한다.



“자신의 불길속에 자신을 태울 완전한 준비를 해야만 한다: 만약에 네가 먼저 재로 변하지 않으면, 감히 어떻게 새로운 네가 될수 있겠느냐? (You must be ready to burn yourself in your own flame: how could you become new, if you had not first become ashes?)”


꼭 신약성서 복음서의 말씀같다. 그중에서도 세례의 의미 즉 다시 재생됨을 말하는 듯도 하다. 하여튼, 새로운 새해다짐을 하자. 그리고 불사조처럼 일어나자. 이건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의 권리이다. 그리고 다시 결심을 ‘깰’ 권리도 나에게 있다. 하지만 그 책임도 나에 전적으로 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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